눈을 도려내려는 힘과 싸워야 했던 여성들
[이라영]
▲ 리 밀러의 종군기자 활동을 다룬 영화 ‘Lee’의 한 장면 |
ⓒ 스카이 시네마 |
초현실주의 영화의 고전인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초반부에는 여성의 눈을 면도칼로 자르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남성들이 써내려간 역사에서 여성은 보는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다. 소외된 '보는 여성'들은 꾸준히 각자의 붓을 들고 싸웠다. 카메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를 든 여자들은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눈을 도려내려는 힘과 싸워야 했다.
카메라를 든 많은 여성들 중에는 리 밀러Lee Miller, 1907~1977가 있다. 그의 이력에는 늘 '보그 모델',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뮤즈'가 따라다닌다. 피카소 그림 속에서, 만 레이의 사진 속에서, 롤랜드 펜로즈 그림 속에서, 장 콕토의 영화 속에서 리 밀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리 밀러는 카메라 앞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 있었던 시간이 더 길다. 피사체가 아닌, 직접 보는 여성으로 바라보자.
밀러는 1907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취미로 사진을 찍던 사람이라 밀러는 카메라와 친숙했다. 미술을 공부하러 파리로 떠났다가 〈보그〉의 모델로 활동했다. 1929년, 만 레이를 찾아가 사진을 배우면서 그의 모델이 되었고, 협업자이며 연인으로 발전했다. 리 밀러는 만 레이와 함께 새로운 사진 기법을 만들어 그들이 참여했던 초현실주의 예술 운동과 잘 부합하는 사진들을 발표했다. 3년 정도 만 레이와 활발하게 활동했던 밀러는 1932년 그를 떠난다. 공동 제작한 작품의 명의와 관련하여 만 레이와 다툼을 벌이던 중 만 레이가 면도기로 밀러의 사진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다. 밀러는 뉴욕으로 돌아가 스튜디오를 만들어 사진 작업을 계속했다. 그해 뉴욕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서 티나 모도티, 라즐로 모흘리 나기, 세실 비튼 그리고 만 레이 등과 전시회에 참여했다. 다음 해인 1933년에는 같은 갤러리에서 리 밀러의 개인전이 열렸다.
▲ 2차 세계대전에 종군기자로 활동한 리 밀러. 1943년 촬영 |
ⓒ 위키미디어커먼스 |
전쟁을 보는 눈
밀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그〉 소속으로 종군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심한 폭격을 받았던 노르망디와 전투가 치열했던 알자스 지방을 돌아다녔고, 프랑스가 나치에 해방되는 순간도 기록했다. 1944년 독일에서는 부켄발트 강제 수용소 사진을 찍었다. 특히 전쟁 막바지 물속에서 떠오른 시체를 찍은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다. 1945년 4월 독일 다하우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막 해방된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찍었고, 히틀러가 떠난 아파트에 들어가 히틀러가 사용했던 욕실에서 목욕하는 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수많은 전쟁 사진을 통해 여성의 눈으로 기록한 전쟁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밀러의 사진에는 간호사와 비행기 조종사 등으로 전쟁에 참여한 여성뿐 아니라 무너진 건물 잔해 곁에서 음식을 만드는 독일 여성 등 일반 시민들의 모습도 담겨있다. 밀러는 전쟁 중에 〈라이프〉지의 특파원으로 왔던 세 살 연상의 마가렛 버크화이트를 만났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찍은 다른 사진도 존재한다.
밀러는 전장을 누비며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이 카메라에 담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전쟁 후에도 폐허가 된 도시나 나치 협력자를 재판하는 현장 등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후유증은 가볍지 않았고 그는 한동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술과 담배에 의존했다. 전처럼 왕성하게 사진을 찍기는 힘들었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밀러는 요리의 세계에서 자신을 찾았다. 밀러의 집에는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밀러는 그들을 위한 요리를 했다. 젊은 시절 사진에 쏟았던 열정을 요리에 집중하며 보냈다. 그의 요리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 책으로 출간되었다.
카메라를 든 여자들은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눈을 도려내려는 힘과 싸워야 했다.
덧붙이는 글 |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4년 6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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