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富는 富를 낳고…불로소득은 불평등을 낳는다

박병희 2024. 5. 3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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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등 존재하는 자산만으로
생산없이도 화폐 얻는 사람들
1970년대 경제 글로벌화 이후
자본주의 금융화 심각해져
부자들의 과소비·자원 낭비
기후변화까지 가져와 '비판'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지 않고 ‘추출’하는 사람.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드류 세이어는 저서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에서 부자를 이같이 정의한다. 다시 말해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생산에 따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자들은 토지, 빌딩, (생산) 설비 등 이미 존재하는 자산을 지배함으로써 생산하지 않고도 화폐를 얻는다. 부자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세이어는 현대 자본주의는 점점 부자들이 이 같은 불로소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구조화돼 왔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Why We Can’t Afford the Rich)’인 이유이기도 하다. 세이어는 경제 구조적으로 부자들의 추출은 용이해졌고 이에 따라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인 극심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추출을 통해 과도한 부를 쌓은 부자들의 과소비가 불러온 기후변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세이어의 관점에서 소득은 노력소득과 불로소득 두 가지로 나뉜다. 노력소득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을 통해 얻는 소득이고, 불로소득은 토지, 빌딩, 설비와 같은 생산의 원천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소득을 뜻한다. 예로부터 대표적인 불로소득으로 토지 사용의 대가를 뜻하는 ‘지대(地代)’가 꼽혔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도 정책 결정자들은 지대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이어는 오늘날 지대를 통해 부를 증식하는 방법이 점점 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허권이 현대판 지대라고 지적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운영체제(OS), 와이파이 기술 등을 예로 든다. 특허권을 무기 삼아 사용료를 부과하는 행태가 희소한 자원을 통제해 지대를 부과하던 방식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술 개발에 대한 대가는 보장돼야 한다. 개발자들도 개발에 드는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기술 혁신을 위한 동기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특허권과 저작권을 가진 사람들이 개발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요금을 사용자들에게 부과한다면? 제약사가 특정 질환에 매우 효과적인 신약을 개발한 뒤 막대한 가격을 책정한다면? 과도한 사용료는 혁신에 따른 혜택이 확산하는 것을 제한해 혁신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사실 MS의 빌 게이츠 창업주가 수십 년째 세계 최고 부자 순위를 지키고 있듯 오늘날 자산가들 중 상당수는 특허를 활용한 지대 추구 방식으로 부를 늘렸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고 세계은행(WB) 수석 경제학자를 역임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2012년 출간한 저서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에서 "부자들이 얻는 수익은 상당 부분 지대 추구가 활발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세이어는 지난 수십 년간 씨앗, 소프트웨어, 경영방식, 금융상품 등 지식재산권(IP)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지대 추출의 원천도 넓어졌다고 설명한다. IP를 둘러싼 갈등도 커졌고 이는 법률 시장이 커지는 배경이 됐다. 한편으로 IP는 지식과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아이디어 경쟁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고 세이어는 지적한다.

이처럼 지대 추구 방식을 통한 불로소득이 늘면서 불평등은 점점 심화하고 있다. 1979~2012년 미국 가구의 실질소득을 따져본 결과 1분위(하위 20%)와 2분위(하위 20~40%)의 실질소득은 각각 12%, 0.1% 감소했다. 반면 5분위(상위 20%) 실질소득은 74.9% 증가했다.

세이어는 1970년대 이전에는 최근과 같은 극심한 부의 불균형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실제 1947~1979년 미국 가계 실질소득 변화 추이를 보면 1분위와 5분위의 소득이 각각 121.8%, 98.6% 동반 증가한 것으로 확인된다. 세이어는 이 시기를 ‘생산주의적 자본주의’ 시기라 칭하며 이때는 생산성 향상에 따라 임금과 급여가 늘면서 노동자들이 경제 발전의 과실을 누릴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들어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주의적 자본주의의 이익률이 둔화하기 시작했다. 자본은 수익을 좇아 금융과 부동산 부문으로 유입됐고 금융산업이 비대해지는 자본주의의 금융화가 나타났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돈으로 돈을 버는 일을 중시하는 체제다. 불로소득을 강하게 추구하는 체제인 셈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차입은 당연시됐다. 더 큰 수익을 노릴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입으로 인한 부채는 잦은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이미 비대해진 금융산업은 망하게 둘 수 없다는 소위 대마불사론 때문에 금융위기 때마다 정부는 세금을 투입해 은행을 살리는 사례가 반복됐다.

세이어는 "레버리지(차입)는 은행이 다른 사람의 돈으로 위험 감수의 이익을 사유화하고, 일반 납세자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해서 손실을 사회화하는 방법의 핵심이었다"고 일갈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이처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세이어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인류의 생존과 기후변화다. 세이어는 "기후변화는 과소비의 결과"라고 역설한다. 부유한 이들이 지나치게 많은 옷을 사고,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문해 자원을 낭비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이어가 알려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격언은 꽤 울림이 있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마지막 강이 오염되고 나면, 그때야 우리는 사람이 돈을 먹고살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 | 앤드류 세이어 지음 | 전강수 옮김 | 여문책 | 616쪽 | 3만8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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