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고 밥먹고 수영하다 잠든다…자연 속 완벽 힐링, 롬복

2024. 5. 3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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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신혼여행 ⑬ 인도네시아 롬복


남반구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롬복은 4~10월이 여행하기 좋은 건기다. 맑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 가을에 접어드는 4월부터 추수를 시작한다.
인도네시아 롬복 섬에서도 한 달을 살았다. 숙소는 월 50만 원 정도에 빌렸다. 집주인이 사는 본채와 여행자용 별채, 10m 길이의 수영장 그리고 잘 가꿔진 정원까지 갖춘 1000㎡(300평) 부지의 저택이었다. 마침 운이 좋았다. 우리가 머문 기간에 집주인이 고향에 가 있어서 이 모든 걸 우리 둘만 누릴 수 있었다. 식사는 주택에 상주하는 솜씨 좋은 가사도우미가 책임졌으니, 책 읽다가 밥 먹고 수영하다 잠드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그러다 심심하면 시내 구경을 나갔고 가끔 땅을 보러 다니며 귀족 놀이도 해봤다.

아내의 여행

서핑으로 유명한 ‘바투 라야르 두둑 해변’.

롬복에서 한 달을 지낸 건 2015년 4월이었다. 적도 아래 남반구에 위치한 섬은 가을을 지나는 중이었다. 습도는 낮고 강수량이 적었다. 이런 화창한 날씨가 10월까지 이어진다.

롬복은 섬의 크기나 인구수, 자연환경이 이웃한 발리와 똑 닮았다. 하지만 종교가 두 섬의 분위기를 확연히 가른다. 힌두교를 믿는 발리가 여행자에게 자유로움과 약간의 방탕함을 선물한다면, 무슬림이 대다수인 롬복은 차분하고 고요해서 자연 속 힐링을 바라는 이에게 안성맞춤이다. 롬복은 종교 영향 때문에 발전 속도도 더디고 부동산 개발에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관광업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행자가 늘지 않아 고민이 깊었다. 롬복의 풍경은 30년 전 개발 초기 발리를 연상하게 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조용한 휴양’에 최적화된 조건이 되기도 한다.

‘100% 힐링을 위한 섬’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롬복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300평 풀빌라 숙소에서 오롯이 둘만 머물며 한 달을 지냈기 때문일 수 있다. 휴양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숙소다. 롬복에선 특히나 그렇다.

케케리 마을에서 구한 숙소는 300평 대지에 여행자용 별채가 따로 있었고, 야외 수영장도 있었다.

롬복에서 저렴한 장기 숙소를 빌리고 싶다면 여행자 거리를 벗어나 현지인의 주거지를 찾는 게 좋다. 편의시설은 갖춰져 있으면서도 바가지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 ‘현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이라는 한 달 살기의 취지에도 걸맞다. 우리는 여행자가 잘 모르는 ‘케케리(Kekeri)’라는 작은 마을에서 지냈다. 롬복의 행정 중심이자 사회 기반시설이 집중된 마타람(Mataram)까지 스쿠터로 20분 거리였다.

케케리 마을에서 구한 숙소는 300평 대지에 여행자용 별채가 따로 있었고, 야외 수영장도 있었다.

당시 이 마을 사람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담장 너머로 소박한 현지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가끔 날 것의 장면을 만날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를테면 중년 남성이 개울가에서 바지를 내리고 대소변을 보고, 바로 옆에서 아낙이 아무렇지 않게 공심채를 뜯어가던 모습이다. 그래도 점심시간 나무 그늘에서 식사하는 농부의 모습이나 해 질 녘 그릇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을 보는 것 자체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남편의 여행

우리 돈 1000원이면 망고스틴 1㎏을 살 수 있다. 매일 수영장에서 까먹는 재미로 한 달을 지냈다.

‘어떻게 하면 롬복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까?’

신선한 생선을 숯불에 구워 요리한 아얌 바카르. 입이 얼얼할 정도로 고추 양념이 맵다.

숙소에 도착한 뒤, 엉뚱한 고민에 잠겼다. 네덜란드 국적의 집주인이 롬복의 300평 넘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롬복 부동산 투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운명이었을까? 작은 마을인 케케리는 소문이 빨랐다. 며칠 전부터 한국인 둘이 매일 구멍가게에서 열대과일 ‘망고스틴’을 3㎏씩 사고, 간이 식당에서 1000원짜리 나시짬뿌르(인도네시아식 백반)를 3인분이나 먹고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을 유지 H가 찾아왔다. 한국에서 8년 일했다는 그는 한국어가 유창했다. 우리는 친구가 됐고, 한 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놀러 다녔다. 그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현지 음식을 맛봤다. 인도네시아식 숯불 생선구이 ‘아얌 바카르(Ayam Bakar)’를 먹으며 ‘롬복’의 뜻이 왜 ‘매운 고추’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입에서 불이 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매웠다. 롬복 전통 음식 ‘박소(Bakso)’를 먹을 때는 우리의 갈비탕이 떠올랐다.

마을 학교 어린이들.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여행자는 높은 관심을 받는다.

밥을 먹고 나면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땅 보는 재미는 그동안 몰랐던 신세계였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게 이리 흥미진진할 줄이야! 당시 롬복은 발리보다 투자 가치가 낮았던 터라 부동산 개발이 미진했고,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땅값이 현저히 낮아졌다.

한 번은 6000평 규모의 매물을 보러 갔다. ‘해외에 별장 짓고 싶은 사람 스무 명을 모아 1000만 원씩 갹출하면 어떨까?’ 사기꾼과 이상주의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발상까지 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지 못한 건 H가 “현지인한테 지분 분할을 하지 않으면 땅을 매입할 수 없다”며 만류했기 때문이다.

김경진 기자

5년 뒤 다시 찾아간 롬복은 부동산 개발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다시 만난 H가 “이제는 땅을 사고 싶어도 파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내 인생 최초로 해외 부동산 보유자의 꿈이 그렇게 날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롬복 한 달 살기 여행정보=·비행시간: 10시간 이상(직항 없음, 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 등 경유) ·날씨: 4~10월 건기 추천 ·언어: 인도네시아어 ·물가: 발리보다 저렴한 편 ·숙소: 500달러 이상(마타람 부근, 수영장 포함한 집 전체)

김은덕·백종민

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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