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날 벌어진 비극, 이 주인공의 선택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말>
[송주연 기자]
▲ JTBC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포스터 |
ⓒ JTBC |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살아온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점점 더 이런 생각들을 자주 하는 것 같다. 행복했던 순간도 후회되는 순간도 회환과 그리움으로 남아 마음 한편이 아려오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귀주(장기용)의 초능력이 참 부러웠다. 귀주는 과거의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는 능력이 있다. 눈만 감으면 과거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귀주처럼 그 시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드라마 초반 귀주의 초능력은 축복이 아닌 저주로 그려진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귀주. 귀주는 반복되는 좌절을 경험하다 결국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진다. 그런데 다해(천우희)를 만나면서 조금씩 능력을 회복하더니, 능력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침내 초능력이 '축복'이 된 것이다.
왜 귀주는 다해를 통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 그 심리적 여정을 따라가 본다.
초능력을 잃어버린 초능력 가족
귀주의 가족은 초능력 가족이다. 엄마 복만흠(고두심)의 성을 물려받은 이들 '복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각기 다른 초능력을 지녀왔다. 귀주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반면, 만흠은 미래를 예견하는 예지몽을 꾼다. 이 예지몽에 따라 복씨 집안은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귀주의 누나 동희(수현)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고 귀주의 딸 이나(박소이)는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면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을 케어하는 아버지 엄순구(오만석)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복씨 성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다. 순구는 복씨 집안의 비밀을 지키면서 그림자처럼 이들을 케어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그런데 이런 복씨 가족들이 언제부턴가 그 능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이나의 말에 따르면 이는 '현대인의 질병' 탓이다. 만흠은 불면증, 동희는 비만, 귀주는 우울증으로 더 이상 자신의 초능력을 쓸 수가 없다. 만흠과 동희는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귀주만은 다르다. 우울증에 빠진 그는 자신의 초능력을 저주처럼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귀주의 우울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시작됐다. 소방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딸 이나가 태어나고 이날은 귀주에게 가장 행복한 날로 기억된다. 바로 그날 인근 학교에 큰 불이 난다. 갓 태어난 딸을 보러 가라고 자신의 당직을 대신 바꿔준 선배는 그 화재 현장서 목숨을 잃는다. 귀주는 선배에 대한 죄책감에 빠지고, 그때부터 눈만 감으면 계속 그날로 돌아간다.
▲ 귀주는 과거에 사로잡힌 채 유령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
ⓒ JTBC |
과거는 바꾸거나 채울 수 없다
나는 이런 귀주를 보면서 상담심리사로서 일하면서 만나 온 사람들이 떠올랐다. 상담실을 찾는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불행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 여기고 그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한다. 부모님이 조금 더 나를 사랑해 주었다면, 화목한 가정에 태어났다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면, 그 시험을 조금 더 잘 치렀다면 지금의 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리곤 그 결핍을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자 한다.
이런 분들이 찾아오면 상담실에서 나는 과거를 탐색하면서 그때의 감정들을 함께 느껴보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속에만 있던 과거의 일들과 감정들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고 조금씩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과거를 되돌리거나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결핍과 상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채우기를 체념하는 것은 때론 매우 슬프고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 마침내 알게 된다. 과거의 후회와 상처, 결핍을 다스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 부분을 채우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차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현재의 나를 지키는 것임을 말이다. 이를 깨닫고 나면 그런 과거를 지닌 채 지금까지 애써 살아온 나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며 더 마음껏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곳은 바로 현재
나는 드라마 속 귀주가 다해를 통해 이런 심리적 여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왜 다해로 인해 변화가 생긴 걸까. 드라마는 다해와 귀주의 '운명적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사실 둘의 만남은 많은 부분이 다해의 사기극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귀주에게 변화가 일어난 건 다해가 귀주를 현재에 살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해가 복씨 집안에 등장하기 전까지 이 초능력 가족은 잃어버린 초능력에 대한 걱정, 혹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다. 즉, 현재의 삶이 아닌 마음속에 갇혀 지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다해라는 낯선 존재는 가족들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보게 했을 것이다. 거짓과 진심을 오가는 다해의 오묘한 분위기도 가족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을 테다.
특히 귀주는 자꾸만 자신과 얽히는 다해의 존재가 궁금해 "자기와의 싸움에서 모처럼 이겨서"(2회) 출근을 하기도 하고, 다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외출을 하게 된다. 게다가 가족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던 딸 이나와 다해가 서로 소통하면서 이나에게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다.
이렇게 현재를 느끼기 시작하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초능력이 돌아온다. 하지만, 귀주는 이제 더 이상 가장 행복했지만 선배를 살리지 못한 그때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지금 귀주 옆에 있는 다해와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되찾은 능력은 전보다 업그레이드 되어 다해를 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는 과거에 사로잡혀 지낸 게 아니라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귀주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추억 속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곁에 있는 다해, 즉 현재의 다해인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귀주의 아버지는 5회 다해와 함께 하기를 주저하는 귀주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돌아가서 되돌리면 되잖아. 뒤늦게라도 사과하고, 잘못을 바로 잡고 다해랑은 마음껏 망치고 바보짓 해도 돼. 얼마든지 돌이키고 고치고 그렇게 사랑하면 돼."
▲ 귀주는 다해를 만나 과거에 빠져나와 현실을 딛고 선다. 그러자 초능력이 돌아온다. |
ⓒ JTBC |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현재에서 새롭게 뭐라도 시도하는 거. 그게 낫지 않냐?"
5회 귀주 아버지 순구의 대사다.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후회와 회한이 남기 마련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는 몰랐기에 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는 그 어떤 능력을 지니고도 되돌릴 수 없다. 다만, 그 과거가 내게 미친 영향을 알아차리고, 지금 현재에서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며 바꿔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는 건, 바꾸고 싶은 그 과거로부터 배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귀주처럼 바꾸고 싶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면, 시선을 현재로 돌려보자. 지금 여기서 과거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차리고, 현재에서 보다 나은 선택을 하는 것만이 과거를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초능력자인 귀주도 이것만이 가능했음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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