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관직 얻은 허준... 드라마와 이렇게 달랐다
[이준목 기자]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 tvN STORY |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허준(許浚, 1539-1615)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이자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2000년 드라마 <허준>은 최고시청률 64.8%를 기록할 만큼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드라마 속 허준은 위독한 환자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신묘한 '명의'로서의 모습이 부각된다.
하지만 정작 실제의 허준은 연구와 저술 활동 등을 통하여 '의학자'로서의 업적이 더 두드러지는 인물이었다. 5월 29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0회에서는 '명의 허준의 동의보감 속 건강비책' 편을 통하여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로 살펴본 허준의 진면목을 조명했다.
관직 진출의 차별 받았던 허준이 택한 의관
허준은 1539년(중종 34년) 경기도 양천현(현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에서 태어났다. 드라마에서는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천민 대우를 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허준의 친모는 양반가의 서녀 출신이었고 허준 역시 얼자(천민)가 아닌 서자(중인) 신분이었다. 어릴 때의 허준은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공부도 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준은 비록 드라마만큼 비참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사회제도상 문관같은 정식 관직으로 나가지 못하는 차별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잡직으로 불리던 의관(醫官, 의술에 종사하는 관료)은 가능했기에, 허준 역시 진로 선택의 대안으로써 처음 의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준의 젊은 시절이나 어떤 과정을 거쳐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든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드라마에서 허준을 의술의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 등장하는 유의태라는 인물도 허구다. 유의태 자체는 실존 인물이지만, 그는 허준보다 훨씬 후대인 숙종(조선 19대 국왕)대에나 등장하는 인물이다.
허준이 유의태를 만나 의학자의 꿈을 키우고, 유의태가 제자를 위하여 자신의 시신까지 내줬다는 감동적인 일화들은 모두 후대에 허준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야사와 혼합되면서 극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정작 현실의 허준은 서른이 넘도록 관직에 나가지 못하여 방황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허준은 31세가 되는 1569년이 되어서야 종 9품 내의원(內醫院) 의관으로 발탁되어 본격적인 의술인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당시로서 꽤나 늦은 첫 관직 출사였다.
드라마에서는 허준이 내의원 과거 시험에 수석합격하여 당당히 실력으로 들어간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험없이 천거(추천)을 통한 합격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였던 유희춘이라는 인물의 자서전인 <미암일기>라는 기록에 따르면, 허준이 출사하기 1년 전에 유희춘을 만나 고가의 서적을 선물하며 관직 천거를 부탁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국왕 선조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하여 천거 제도를 적극 장려했다. 조선 사회에서 과거 시험을 보거나 관직에 등용되기 위해서는 고위 관료들의 신원 보증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허준이 아무런 실력도 없이 로비만으로 관직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느날 유희춘이 얼굴에 종기가 나서 고통을 받았는데, 항생제가 아직 없던 시대 특성상 종기는 공포의 병이었다. 이를 본 허준은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던 '지렁이 진액'을 바르는 처방을 내렸고, 유희춘의 종기는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나아졌다. 반신반의하던 유희춘은 크게 감탄하며 그 보답으로 허준을 이조판서였던 홍담에게 천거하여 내의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 tvN STORY |
허준은 왕실을 전담하는 당시 조선의 최고의료기관인 내의원에 입성, 관직의 첫 출발부터 고위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드라마에서 허준이 일반 백성들을 돌보는 혜민서(惠民署) 말단 의원부터 시작해 활약했다는 내용들도 모두 허구다.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간 지 불과 6년 만인 1575년 37세의 나이에 선조를 돌보는 어의(御醫, 국왕의 주치의)까지 승진할 정도로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선조는 평소 잔병치레가 많았고 임진왜란 시절에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질환(조현병)을 앓은 것이 편집증적인 성격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 임금이다. 선조는 건강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고, 자연히 의학 연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1581년(선조 14년)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의학서적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을 집필하게 된다. 이는 중국 의학 서적 원작의 오류를 바로잡고 한국인의 체질에 맞게 재구성한 내용이었다. 허준이 쓴 <찬도방론맥결집성>은 훗날 조선의 공식 의과 과거 교재로까지 채택된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탁월했던 선조가 그만큼 허준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요한 임무를 맡길 만큼 신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또한 허준이 어의를 넘어 '의학자'로서의 역할이 부각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물론 허준은 의술 역시 뛰어났다. 1590년(선조 23) 겨울에는 왕자가 두창(천연두)에 걸려 위독하자 허준이 약을 처방하여 왕자를 치료하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시대만 해도 치료법이 전혀 없었던 두창은 걸리면 반드시 목숨을 잃는 불치병으로 취급받았다.
허준은 중국의 의학서적까지 밤을 새가며 탐독한 끝에 저미고(猪尾膏, 돼지꼬리 피로 만든 고약)가 두창에 효험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하지만 치료법을 찾았다고 해도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왕자에게 실험한다는 것은 허준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허준의 과감한 결단으로 마침내 왕자의 생명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크게 감동한 선조는 허준을 더욱 신임했고, 그를 정3품 당상관(堂上官) 통정대부(通政大夫, 오늘날의 1급 공무원)에 임명하여 의원으로서는 최상의 예우를 해줬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다. 선조가 왜군의 침입을 피하여 도성을 떠나 몽진하자, 허준은 동행하여 피란길에서도 선조의 건강을 돌봤다. 허준은 이 당시 선조를 따라 보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책봉된다.
▲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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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난 1596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전란으로 소실된 자료들을 정비하면서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의 편찬을 지시한다. 선조는 기존의 의학서적들이 내용이 질서가 없고 옳고 그름이 구별되지 않아 혼란스럽다며 한국과 중국의 의학서를 필요한 정보만 하나로 모아서 의학 이론과 처방을 정리하라고 지시한 것. 바로 허준의 대표적인 업적이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동의보감>의 시작이다.
<동의보감>을 시작하는 서문에는 '섭생(攝生)이 먼저이고 약석(藥石)은 그 다음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병에 걸린 후에 치료하는 것보다, 미리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오늘날 현대의학에서 강조하는 예방의학, 면역력 강화와도 일맥상통한다.
<동의보감>에는 중국식 한자명칭과 우리말 표현을 병기하여,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약초를 쉽게 알 수 있게 한글로 기록하게 했다. 이전에도 한글 의서는 존재했지만, 약재 이름 전체를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은 <동의보감>이 최초라는 점에서 국내 한의학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허준 역시 조선에 없는 최초의 의서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다.
하지만 <동의보감>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역경을 거쳐야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의서 편찬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내의원의 최고 어른이 된 허준은 어의로서 왕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느라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전란이 종결된 이후 1601년 선조는 재차 허준에게 500권의 의서를 내리며 중단된 의서 편찬 작업을 재개할 것을 지시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여러 명의 베테랑 어의들이 함께했지만, 이제는 허준 혼자서 막대한 작업을 홀로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허준은 포기하지 않고 <동의보감>의 완성을 위하여 고군분투했다.
1608년 2월, <동의보감>의 편찬이 다시 시작된 지 약 7년 만에 의서의 완성을 보지못하고 선조가 승하한다. 허준은 수석 어의로서 선조의 목숨을 살리지 못한 책임을 물어 한동안 유배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허준은 고통스러운 유배생활 동안에도 의서 편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허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이듬해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내의원으로 복직시켰다.
1610년, 마침내 <동의보감>이 편찬 14년 만에 완성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불가능해보이는 방대한 양의 의서 정리를 오직 허준 혼자만의 힘으로 끝내 완성해낸 것이다. 당시 허준의 나이는 71세였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직접 지은 제목으로 '동의(東醫)'는 북의-남의로 표현되는 중국 의학에 대비되는 '조선의 의학'을 의미하며, 보감(寶鑑)은 보물스러운 귀감이라는 뜻으로 거울에 비치듯이 모든 병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학이 당시 천하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중국 의학에 견줘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민족적 자부심이 반영된 제목이다.
<동의보감>은 총 25권으로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목차편'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인부터 전문가까지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동양 최고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동의보감>의 명성은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퍼졌고, 현대에는 대한민국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어 명실상부한 세계의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한 이후에도 의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허준은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등을 편찬하여 전염병 연구에 매진했고, 내의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심혈을 쏟았다. 그렇게 평생을 조선 의학의 발전에 헌신한 허준은 1615년(광해군 7년) 7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은 허준의 공을 높이 기려서 사후 그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품계를 내린다. 서자 출신이자 의관에게는 한 번도 내려진 적이 없었던 파격적인 조치였다.
실제 허준의 삶은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강인한 인내심과 사명감이 더 빛나던 인물이었다. 일생을 바쳐 백성들을 위하여 병을 연구하고 책을 만들어낸 허준의 장인정신은, '진정한 의술인'의 자세와 역할이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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