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쓰는 사람들을 위하여

정슬기 2024. 5. 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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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 <쓰기의 말들> 을 읽고

[정슬기 기자]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들렀다 은유 작가의 책 <쓰기의 말들>을 집어 들었다. 비교적 얇은 두께의 작은 페이퍼 북이어서 아이가 책을 고르는 동안 가볍게 읽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자 내 가벼운 마음은 금세 부풀어 올랐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몇 번이나 멈춰야 하는 순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스스로를 '문장 수집가'로 칭하며, 그간 읽으며 감동하고 공감했던 문장과 그에 대한 단상을 써내려 간 에세이이다. 여타 책들에 비해 프롤로그가 길다고 느껴진 건, 그녀가 '자신만의 쓰기의 말들', '잊지 못할 문장들'을 모으기까지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인 듯했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철학서나 에세이 만큼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 '분량 대비 건질 만한 문장이 없어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녀가 그동안 읽은 방대한 문장들 중 고르고 골라 이 책이 완성됐을 거란 생각을 하면, 내가 문장 하나하나, 책 한 장 한 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것 같았다.
 
 쓰기의 말들 표지
ⓒ 유유
 
나는 그녀가 책을 쓰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가끔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뒤죽박죽인 내 마음을 정갈하게 펼쳐 놓은 듯해 반갑고 후련했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들이었지만, 마음에 콕콕 박히는 구절들이 많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깊은 공감과 동질감, 감탄하는 순간이 많아 책장을 쉬이 덮기 힘들었다.

특히 '미련이 내게 준 선물이 바로 글쓰기'다, '자기 고통에 품위를 부여하는 일이 글쓰기'인 것 같다는 문장은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도 그녀처럼 살다 보니 말하지 못한 것, 때를 놓친 것, 엉망이 되어 버린 것들로 가슴이 꽉 차 도저히 말로는 풀어낼 수 없을 즈음 문득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평온해졌다.

그냥 쓰기만 했는데 내 고통이 사그라들고 그럴만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만약 그 상황에서 미련하게 참지 못하고 내 모든 맘을 거친 말로 뿜어내기만 했다면, 고통에 품위가 생기기는커녕, 고통에 잠식된 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언젠가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최승자, 워드프로세서)을 체감할 즈음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 역시 요즘 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일상을 돌아보고 글로 옮기면 내 삶이 완성되는 것 같고, 그 어느 때보다 뭔가를 쓸 때 내 마음이 한결 순해짐을 느낀다. 쓰면서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네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 쓰고 난 후엔 어디에서도 느낀 적 없던 충만함을 느끼며 쓰기가 내 삶에 들어와 정말 행복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어디 가서도 내가 뭔가를 쓴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내 행동 반경과 바운더리가 좁은 탓일 수도 있지만 주변에 글 쓰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어떤 이들에겐 그 시절 군대 얘기가 그저  그런 남의 얘기인 것처럼, 나의 이야기는 나에게만 절실할 뿐 다른 사람에겐 전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지 않은 그들에게 시시콜콜 나만의 이야기를 온전히 다 털어놓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자꾸 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연애할 땐 사랑하는 사람이, 아이를 키울 땐 아이가 내 삶의 레퍼토리가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에게 내가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내가 쓴 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엄청난 부끄러움을 무릎 쓴 결과다.

물론 그들은 나를 응원해 주지만 한편 돈도 안 되고 힘만 드는 이 일을 왜 계속 하려는지 의아해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내 관심사를 속속들이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에 갈증을 느낄 즈음 만난 이 작품은 그래서 내게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그녀가 곱씹었던 문장들을 함께 곱씹으며 나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미 여러 권의 에세이집과 산문집, 인터뷰집을 낸 작가는 독학으로 쓰기를 배웠다고 한다. 처음부터 뭔가를 쓰겠다는 목적은 없었으나 우연히 읽기에서 쓰기로 전환이 일어나 자유기고가의 삶을 시작했다고 하니 역시 '다독'은 작가가 되기 위한 초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별도의 창작훈련이나 글쓰기 작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독서를 통해 자기만의 문장 스승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암시, 은유적 서술, 생략, 파격적 구문으로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한 니체에 영향을 받아 필명도 '은유'로 지었다 하니, 그녀의 읽기와 쓰기에 니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만했다. 그녀가 잠깐 소개한 니체의 문장만 보고 나 역시도 니체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 책엔 그녀의 문장 스승 니체와 마르크스 외에도 국내외 작가와 시인, 조선시대 실학자 박지원에 이르기까지, 동서양과 세대를 막론한 여러 작가의 문장이 잠언처럼 박혀 있다. 또한 그녀가 매혹된 문장 옆 오른쪽 페이지에는 문장을 읽고 떠오른 생각과 그녀만의 해석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나는 그녀가 선택한 104개의 문장 보다 문장을 통해 풀어낸 그녀의 사유에 고개를 끄덕이는 때가 더 많았다. 누군가 불러줘 내 이름이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설명을 듣고 다시  문장을 보면 처음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드러났다.

그녀가 선택한 '쓰기의 말들'은 분명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으나 그녀의 해석이 더 와닿았던 건, 글쓰기에 대한 본질과 쓰는 사람의 자세, 글 쓰는 방법 등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문장을 탐한 건,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을 테니, 쓰기에 관련된 문장과 사유가 도출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서 104개의 문장과 그녀의 해석은 내게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과 실용적인 팁까지 더해져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너무나 유용하고 와닿는 구절들이 많기에  오랜만에 필사를 해보았다. 그녀가 쓴 문장들을 탐하고 모았다. 니체가 그녀의 쓰기 스승이 되어준 것처럼 그 순간 그녀도 내 쓰기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한 방식으로, 동료애와 우정까지 느낄 수 있는 덤도 함께. 그래서 나는 이 책 표지에 써 있는 부제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밑에 한 줄을 더 추가하고 싶다.

'뭐라도 쓰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막막함과 외로움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하여'

책을 읽으며 그녀가 계속 나를 토닥이는 것 같았다. 쓰기에 대한 욕망, 쓰기를 마주하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 기쁨과 슬픔, 막막함, 괴로움들은 결국 쓰기를 통해서만 희석될 수 있으니, 지치지 말고 두려워 말고 숨기지 말고 그저 계속 쓰라고. 씀으로 네 안에서 빠져나와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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