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훌륭한 오프닝
[김성호 기자]
픽사 스튜디오는 할리우드, 나아가 영화산업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애니메이션들을 내놓은 회사다. 드림웍스, 지브리 스튜디오, 아드만 스튜디오 등 애니메이션의 강자가 없지 않다지만 픽사만큼 꾸준히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작품을 내어놓은 제작사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픽사를 상징하는 것이 기술력이라고들 하지만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그저 기술력만으로 뚝딱 만들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를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지브리의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결국 애니도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예술, 관객을 몰입시켜 감탄케 하고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게 하며 마침내 감동시켜 변화토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력 못잖게 이야기가 지닌 힘이 중요할 밖에 없다.
▲ 업 포스터 |
ⓒ JIFF |
픽사 최고의 자산, 피트 닥터의 대표작
그중에서도 작품성이며 흥행에서 참패한 채 물러난 몇몇을 제외하면 성공적으로 픽사 대표 감독으로 커리어를 이어온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토이 스토리> 1,2편을 성공시킨 뒤 제작자로 변신한 존 라세터를 필두로, 픽사 대표 각본가 출신인 앤드류 스탠튼, <인크레더블> 시리즈의 브래드 버드 정도가 감독으로 제 역량을 증명했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천재라 불리운 사나이, 피트 닥터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CGI 애니메이션 관련해선 세계 최고 명문이라 해도 좋을 칼아츠를 졸업하고 바로 픽사에 영입된 피트 닥터다. 선배인 존 라세터가 픽사의 주력으로 활약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는 픽사에 영입되자마자 중책을 맡는다. 그렇게 얻은 첫 총감독은 대성공으로 돌아가니, 다름 아닌 픽사의 네 번째 작품 <몬스터 주식회사>다. 속편도 4편이 가장 어렵고, 제작사도 네 번째 흥행이 가장 어렵다던 속설을 단박에 깨뜨린 이 작품은 피트 닥터라는 이름을 전 세계 애니메이션 업계에 선명히 새기도록 했다.
▲ 업 스틸컷 |
ⓒ JIFF |
<업>의 오프닝은 그야말로 압권
픽사의 가장 큰 자산이 기술이 아닌 인물이라는 평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특히 존 라세터와 피트 닥터로 이어지는 조합은 제작과 연출로써 픽사의 걸작을 여럿 탄생시켰다. <업>도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많은 이에게 픽사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이 영화는 기획과 구성, 연출과 기술면에서 짝을 찾기 어려운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업>의 오프닝시퀀스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픽사를 넘어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오프닝이라 해도 반박할 이 얼마 없을 테다. 오프닝은 칼과 엘리 부부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칼과 엘리는 젊은 시절 만나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함께 많은 즐거움을 누리고 슬픔 또한 겪어낸다. 시간은 마침내 흘러 서로를 이별케 하고, 칼은 엘리가 떠난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다.
▲ 업 스틸컷 |
ⓒ JIFF |
무정한 시간이 마침내 모두를 앗아가고
영화는 마침내 모든 걸 앗아가는 시간의 흐름을 은근하지만 단호한 카메라 움직임 가운데 표현한다. 젊은 시절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지나 노을 아래 늙어버린 노부부의 모습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의 서글픔을 알도록 한다. 마침내 홀로 남겨진 칼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비로소 시작을 알린다. 모든 것의 끝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부부의 희로애락 가운데 자주 함께 했던 풍선이 그의 집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부터. 요컨대 사랑의 힘으로 현재를 극복하며.
짤막한 오프닝이 던진 슬픔을 뒤로 하고 이야기는 일대 모험으로 옮겨간다. 80을 바라보는 독거노인이 된 칼 앞에 집을 팔라는 개발업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칼은 아내의 손길이 닿은 집을 팔 수가 없다. 갈등이 지속되는 와중 요양원에 강제로 수용될 지경에 처한 칼, 그는 아내가 생전 꿈꾸었던 남아프리카 파라다이스 폭포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JIFF |
한국 애니메이션의 오늘을 돌아보면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특별상영 섹션, '픽사 in 전주 with <인사이드 아웃 2>'에서도 <업>은 단연 뜨거운 인기를 자랑했다. 남녀노소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픽사돔이라 이름 붙은 전주돔을 찾아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작품이 제작되고 15년이 흘렀지만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세련됨이 이 영화 안에 녹아 있다. 어쩌면 오늘의 관객이 채플린의 영화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며 <7인의 사무라이>를 지루한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업> 또한 그와 같은 작품으로 남으리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픽사와 디즈니의 스튜디오 시스템, 즉 특정한 작가 한두 명이 아닌 인간의 심리며 문학적 상징을 깊이 이해한 작가진이 씨줄과 날줄을 엮어가며 세심하게 짜낸 결과물이 바로 <업>이다. 고전을 살아 움직이는 2D 세계의 애니메이션으로 옮겨냈던 지난 세기 디즈니의 작업들과 첨단 CGI 기술로 독자적 이야기를 구현해낸 21세기 픽사의 작품군은 예술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지를 일깨운다.
그 사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오늘을 돌아보게 된다. 하청 애니메이션에서 창작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한 산업구조는 물론, 세계적으로 시장을 확대해가는 유아 대상 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를 생각한다. 반면 청소년 및 성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대상을 연달아 받았던 <마리 이야기>와 <오세암>, 또 연상호라는 걸출한 작가의 <창> <돼지의 왕> <사이비>와 같은 작품들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능성 만큼은 충만하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럼에도 한국 애니메이션을 찾는 관객층의 부재, 연상호와 같은 작가마저 등을 돌리게 되는 시장 환경 같은 부정적 요소 또한 엄존하는 게 사실이다. 한국 영화제를 대표하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축제의 중심인 전주돔을 디즈니에게, 또 픽사 작품군에게 내주어야만 했던 현실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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