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으로 쓴 4년 차 기자의 생생한 경험담

김성호 2024. 5. 3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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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27] 고기자의 <고기자의 정체>

[김성호 기자]

저널리즘에 대한 교육을 듣고 있다. 3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이뤄지는 수업, 강사는 언론인과 언론학자들이다. <뉴스타파>에서 진행하는 '뉴스쿨' 과정으로, 대안언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들, 또 직접 대안언론을 창업하려는 이들 1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수업을 듣는다.

수업 가운데, 언론사며 언론의 현실을 논할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혐오며 불신과 같은 것들이다. 온라인 등록 매체만 1만 곳이 훌쩍 넘는 포화상태, 지상파와 종편, 신문과 온라인매체까지 양적으론 역사상 가장 팽창했다 해도 좋을 오늘이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심각한 수준이다. 국민적 기대에 현저히 못미치는 보도, 감시와 견제라는 본연의 목적 대신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는 보도가 이어지는 탓일 테다. 언론도 사업체고, 언론인도 직장인이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이익추구가 실망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적잖다. 기레기며 기더기 소리까지 등장한 오늘의 언론 현실은 이들이 충성할 대상인 시민들이 언론에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혐오와 무관심을 멈춰야 하는 이유

혐오와 무관심은 오늘날 한국 언론과 사회가 처한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혐오는 싫어하여 미워하는 마음이다. 판단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고, 그로부터 행동이며 태도로 이어진다.

혐오가 싹트기까지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들이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일단 혐오가 태어난다면 합리와 논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미 싫어하고 그러니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언론이 진정 필요한 곳에 있지 않다는 생각, 필요한 곳에 있더라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생각, 제대로 보더라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 수많은 지점들에 불신이 깊게 자리한다.

그 불신이 쌓여 안 봐도 안다는 식의 혐오로 발전한다. 혐오를 가진 이들로부터 들은 수많은 사례를 나는 그들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그 혐오를 얼마간 이해한다. 그러나 혐오는 혐오의 대상을 더욱 혐오하게 만들 뿐이다.

그로부터 반드시 나아질 기회를 앗아간다. 그렇게 혐오는 야만을 불러온다. 무관심 또한 마찬가지, 문제를 해소하는 대신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하는 두 가지 흐름으로부터 한국사회와 언론은 제게 주어져야 마땅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하려는가.
 
▲ 고기자의 정체 책 표지
ⓒ 출판공동체편않
 
<고기자의 정체>는, 또 이 책이 속한 출판공동체편않의 시리즈는 이 같은 상황에서 읽어봄직 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에 어떠한 뿌리가 있는지를, 내부인의 시각에서 알게 하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감정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다.

언론을 수준 낮고 양심 없고 무책임한 것으로 바라보기 전에 우리가 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만약 이해가 깊어진다면 조금은, 아주 조금쯤은 더 인내를 가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책은 한 기자가 바라본 언론의 초상이다. 시리즈의 앞선 두 권, <박정빈의 현장>과 <손정빈의 환영>과는 달리 이번 편의 저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실명과 소속 대신 '고기자'라는 필명을 쓰는데, 그 덕에 더욱 솔직한 글을 써내려갈 수 있었던 듯 보인다. 고기자는 또한 같은 이름으로 SNS에 언론인으로 일하며 느끼는 단상을 만화로 연재하고 있다고 한다.

책은 크게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저자가 책을 쓰기까지의 사연부터 회의하면서도 아직 기자이기를 선택하는 저 자신의 모습까지가 진솔하게 펼쳐진다. 저자가 바라본 언론의 여러 모습들, 이를테면 수습기자 교육시스템과 기자의 취재과정, 유출되는 인재들과 불합리한 업계의 문화 등 기자로 일하며 마주친 특이점들을 사실적으로 소개한다. 섬세하고 다정한 성품이 묻어나는 글로부터 폭력적이고 비루한 언론계의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은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여길 만하다.

저자가 책으로 옮긴 수많은 장면 중 대부분은 나 또한 마주했던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서 기자로 일한 이들이라면 대부분 겪었을 지점들이 아닐까 한다. 누군가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으나 문제를 알면서도 지나친 이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많은 경우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건 대단치는 않을지라도 바람직한 자세다. 제 바깥의 문제에는 엄격하기 그지없고 이따금은 침소봉대하기까지 하는 것이 기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제 안의 문제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고는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는 이가 세상의 정의를 이야기하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조지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야, 저 새끼 조져!" 하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조질 만한 악덕한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대상으로도 쓰지만, 광고를 주지 않거나 협찬을 하지 않고 고깝게 구는 기업 담당자에게도 흔히 쓴다. 같은 기자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누군가 지각하면 농담 삼아 "늦게 오면 늦게 온 만큼 조져야지" 한다. 말을 잘 안 듣는 수습기자가 있다는 동료의 고민에는 "조지면 되는데 뭔 고민이냐?" 하고 만다.

도대체 뭘 그렇게 맨날 조진다는 걸까. 매일 쓰는 말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자연스럽게 폭력이 배어났다. 배어난 폭력이 발밑에 웅덩이를 이뤘고, 그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은 곧 폭력이었다. 이렇게 될 거면 수습기자였던 난 도대체 왜 그렇게 울었던 걸까? 계속 날 무시하고 폭언을 하던 사수만 보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책장 아래에 숨겨 둔 신경안정제를 가방 속에 챙기고 다녔던 건 다 무슨 의미였을까? -97, 98p

이땅 모든 고기자들의 평안을 바라며

언론의 진면목에 대해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 책이다. 언론에 몸담은 이의 시선에서 돌아보는 여러 문제는 바깥에서는 쉽게 알지 못하지만 기자라면 누구나 가져봤음직한 고민의 지점들이다. 오늘날 언론이 노정하는 여러 실패가 이 책이 살피는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책 가운데 드러난 여러 문제의식에 비하여 저자가 있는 힘껏 맞서본 것이 있는지를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독자라면 그릇된 체계 안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푸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공고해 보이는 벽에 진심으로 부닥치는 순간이야말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되는 탓이다. 그런 순간이 없는 책이라면 혐오와 무관심의 벽을 치워내기 역부족이지 않을까.

책을 쓸 당시 저자는 4년차 기자였다고 한다. 막내급 중에서는 가장 큰 막내라던 그가 이제 6년차 쯤이 되었을 텐데,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체가 아닌 성장을, 절망이 아닌 희망과 마주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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