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거부권... 대통령님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이혜연 2024. 5. 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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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편지] 전세사기 피해자가 특별법 개정안 거부한 대통령에게

[이혜연 기자]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민주유공자법제정추진단 관계자들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해 정부로 이송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과 민주유공자법을 즉각 공포할 것을 촉구했다.
ⓒ 유성호
 
안녕하세요, 윤석열 대통령님. 청년 전세사기피해자 당사자입니다. 이전 국토부 장관에게 보낸 공개편지가 가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관련기사: '덜렁덜렁'해서 당했다? 이 치밀한 사기 각본을 보세요 https://omn.kr/28p5g). 이번엔 대통령님께 편지를 씁니다.    

다소 개인적인 정보이지만, 저는 99년생으로 올해 이른바 윤석열 나이로 25세입니다. 23세 즈음에 전세사기피해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제 20대 초반이 전세사기와의 싸움으로 켜켜히 쌓여왔고, 이제 중반까지도 쌓이고 있습니다. 물론 나이는 사기 피해의 가중과 관련이 없습니다만 사회 첫 걸음이 사기로 인한 빚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부러 나이를 밝혀 적습니다.

아직 사회로 제대로 나가기 전부터 제가 모을 수 있을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 금액의 빚이 저의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재산 이력에서 마이너스를 보면 가슴이 갑갑합니다.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약칭: 전세사기피해자법)이 제정됐을 때 대책위를 통해 피해 구제 상담을 했습니다. 당장에 청산해야 할 큰 금액의 빚,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주거 불안정, 뭐든지 다 직접 뛰어다니며 알아내야 하는 정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으며 물었습니다.

"혹시, 법이 개정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불투명합니다. 지금 이게 최선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말에 담담히 해결해 나가려던 저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무너진 일상에서 기력을 모으고 모아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피해 구제를 위해 힘을 쓰면 쓸수록, 제 일상은 점점 더 피폐해졌습니다. 기력을 모으기 위한 시간이 곱절씩 늘었습니다. 힘들어서 몇 날 며칠을 까딱하지 못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제 미래를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마음으로 다시 대책을 찾아나섰습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악의 뫼비우스의 띠였습니다. 매번 갈가리 찢긴 마음을 덧붙이고 덧붙여 어느덧 저는 누더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희망이 다시 절망으로

28일 전세사기피해자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저에게는 한줄기 희망이었습니다. 제 미래를 다시 가늠해 볼 수 있고, 제 목을 옥죄는 이 굵은 빚의 올가미를 끊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습니다. 네, 저는 누더기만 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숨 한 번 쉬기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올가미가 목에 턱 걸렸습니다. 29일 대통령님은 끝내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아, 개정안이 폐기되면 또 저 많은 것들을 감내해야 하네. 그렇게 되면 다시 일상 회복이 가능할까?

정부는 계속 점진적 해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놓은 정부안은 점진적 해결도, 저와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선 구제를 통한 일상 복귀입니다. 이제 전세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합니다. 제가 피해 입은 거주지에서 사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안온해야 할 집이 '나의 미래를 포기 당한 불안정한 공간' 되어 버렸습니다.

저에겐 안온하고 편안한 공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 몸 편히 뉘일 공간도 없고 앞으로도 편히 쉴 공간조차 없을지 모른다는 게 모든 불안의 원천입니다. 주거는 사람이 일생을 영위하기 위해 꼭 필요하며 그렇기에 '집'을 대여하는 전세와 월세는 단순한 사적 계약이 아닌 공공 필수재입니다.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인해 사기를 당하고,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국가가, 정부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누가 구제할 수 있을까요? 저희가, 피해자들이 마음 놓고 피해 구제를 받고 일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우리의 국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윤석열 대통령. 2024.5.21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개정안은 저와 피해자들의 미래이자 집이며, 국가이고 희망입니다. 개정안 국회 통과로 드디어 저희도 새롭게 미래를 그려볼 새 종이를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개정안을 거부하는 것은 그 종이를 받아보기도 전에 찢고, 저희가 가진 크레파스까지 부러뜨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어떤 범죄자들에 대해 '너도 똑같이 당해봐야 알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원수, 제 부모의 원수가 온다 해도 '전세사기나 당해라'라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하실 일이야 없으시겠습니다만 대통령께서도 전세 사기가 없는 안전한 사회, 그런 국가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새 종이를, 더는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어디 하나 성치 못해 크레파스가 그려지지도 않는 종이 말고, 테이프가 조금 붙었더라도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종이를 갖기를 희망한 저희 피해자들의 바람을 대통령님은 사정없이 짓밟았습니다. 

개정안 거부는 저와 수많은 피해자들의 목숨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해결될지 모른 채 빚을 지고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점진적 피해 보상이 아니라, 저희를 옥죄는 빚을 탕감해 줄 선 구제안이 절실합니다. 점진적 일상 회복은 점진적 피해 회복이 아니라 피해가 완전히 해결된 이후부터 가능합니다. 

이미 미래를 잃어버린 제가,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쉴 수 있는 집을 다시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준 개정안을 대통령님은 끝내 거부했습니다. 국가가, 정부가 누군가의 미래를 거부하는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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