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한 칸 책방'을 열었습니다

김성호 2024. 5. 2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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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바로여기 2] 독립서점 '경원동#'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김성호 기자]

봄에는 전주, 가을엔 부산이라고들 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라면 다른 영화제는 몰라도 봄과 가을, 이 두 도시 만큼은 반드시 찾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 벌써 10여 년째 나는 봄이면 전주로 향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는 전주로 갔다. 이달 초 열린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2024. 5. 1~5. 10)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전주에서 보낸 열흘 간 나는 많은 귀한 것들과 마주했다. 아직 이름 없는 평론가에겐 꽤나 자극이 되는 만남, 이를테면 내 이름과 글, 얼굴까지도 알고 있는 이들이 그중 하나였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또 그들의 추천을 받아 방문한 여러 음식점 또한 충격적이었다. 그저 검색으로, 지도에서 별점 높은 곳을 찾아 갈 때는 만날 수 없었던 멋진 식당을 나는 여럿 알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맛을 아는 이들이 전주를 가리켜 '맛의 도시'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서울 어느 대단한 기술자에게도 밀리지 않는 훌륭한 이발사와 그의 오래된 이발관을 안 것도 뜻밖의 수확이었다. 안주인은 누군가 가게 앞 작약꽃을 죄다 잘라갔다며 한참이나 서운해 했다. 오래 공 들인 노력은 아랑곳 않고 개중 작은 한 송이만 남겨두고 꽃을 죄다 잘라간 이를, 그러나 함부로 욕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지켜보는 나까지도 서운하게 하였다. 그런 못된 사람조차 예쁜 건 알아보네요. 서투른 위로가 닿은 듯 웃음 터뜨리는 안주인에게서 그 선한 품성이 비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러니까 시간과 함께 낡아가는 한옥마을 인근 어느 이발관 앞에서 예쁜 꽃을 본다면 부디 잘라가지 마시라.
 
▲ 경원동# 서점 내부
ⓒ 김성호
 
우연히 만난 독립서점

이번 전주 여행길에서 기억에 남는 장소는 이뿐 만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길, 제법 많았던 수확 가운데 하나는 전주시내 영화의 거리 코앞에 있는 쪼매난 독립서점을 발견한 일이다. '경원동#'이라 이름 붙은 이 서점을, 나는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매년 봄에 찾는다곤 하지만, 결코 쉬운 걸음은 아니다. 서울과 전주의 거리는 잘 닦인 교통편에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주는 때문이다. 그리하여 간만에 만나는 귀한 약속을 몇 잡게 되었는데, 그들이 내게 부탁을 해왔다. 지난해 낸 내 책에 사인을 해달라는 것.

짐을 줄일 셈으로 전주 시내 서점에서 사서 사인해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베스트셀러 아닌 책을 지방도시 서점에서 구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점 네 곳을 돈 뒤에야 나는 내가 이 도시에서 내 책을 구할 수 없단 걸 깨달았다.

'경원동#'(아래 경원동샵)은 그날 찾은 다섯 번째 서점이었다. 특별한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고, 영화제가 펼쳐지는 영화의 거리 코앞이라기에 들러본 걸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전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함을 마주했다.
  
▲ 경원동# 서점 내부엔 책을 읽고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노동과 도시, 지역불균형이며 청년과 환경 문제 등 다양한 모임이 이뤄진다고 한다.
ⓒ 김성호
 
경원동샵은 독립서점이다. 독립영화, 독립언론, 독립서점까지, 독립이란 글자가 가난하고 뭣도 없는 것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만, 진실로 던져야 할 질문이란 그와는 전혀 다른 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래 생각해왔다. 무엇으로부터 독립하려 하는가. 모든 '독립'자 붙은 것에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이것이다.

누구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누구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할 테다. 그러나 어디 그것만이 독립의 대상이랴. 썩어빠진 체제로부터, 불공정한 유통으로부터, 구닥다리 운영방식으로부터도 독립을 선언하는 이들이 있다. 너는 그중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가. 모든 독립 어쩌고 하는 것들을 마주하여 내가 궁금해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경원동샵 또한 독립서점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고 들으니 서점의 흔한 운영방식으로부터의 독립이요, 지방이며 지역, 공간에 대한 흔한 인식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말하자면 발상의 전환이고 고정관념의 탈피다. 하나같이 어려운 일이다.

다음 중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독립하느냔 말이다. 가출청소년과 비행청소년이 독립청소년이 아니듯이, 방법을 구하지 못한다면 독립이라 부를 수 없다.
 
▲ 경원동# 책장을 임대한 이가 저만의 취향으로 단장해둔 모습. 해당 칸의 상호는 '#사거리책방'이다.
ⓒ 김성호
 
책을 팔지 않는 서점

경원동샵은 책을 팔지 않는다. 아니 책을 팔기는 하는데 이 서점의 책을 팔지는 않는다. 무슨 소린고 하니 경원동샵이 하는 일이란 책장을 파는 것이고, 그 책장을 산 이들이 경원동샵에서 책을 파는 것이다.

경원동샵은 자리를 팔고 책을 파는 걸 중개한다. 백화점이 점주들에게 자리를 팔아 영업하는 것과 엇비슷하다. 손님은 쌤쏘나이트에서 가방을 사지 현대백화점에서 사는 게 아니다. 경원동샵이 제 집에 들어앉은 책꽂이 주인들 대신 판매까지 대행한단 것이 다를 뿐이다.

경원동샵과 계약한 이들은 책장을 6개월 단위로 빌린다. 그 책장에 제가 원하는 책을 놓아 팔 수도 있고, 그저 진열만 할 수도 있다. 책이 아닌 다른 무엇도 올릴 수 있다. 울리기만 해도 경건해지는 싱잉볼이나 제가 쓴 글과 그림, 사진 따위를 올리두는 것도 가능하다. 제 공간이니 무엇이든 된다. 전시장이나 미술관처럼 쓸 수 있고, 서점 본연의 목적에 맞게 책장으로 꾸밀 수도 있다.

누가 책장을 빌릴까. 그야말로 다양하다. 나처럼 서점 너덧 군데를 다닌 뒤, '제기랄 전주 시내에서 작년에 나온 내 책 한 권 구할 수가 없다니!' 하고 분노한 이들이 책장주가 될 수도 있겠다. 또 누구는 홍보로, 누구는 판매가 제법 일어나리란 계산으로, 누구는 제 취향을 과시하고 싶어서, 누구는 제가 꼭 추천하고픈 책이 있어 이 책장을 빌릴 테다. 이유야 무엇이든 그것이 그대로 경원동샵의 수익이 된다.
 
▲ 경원동# 책장을 임대해 서점주가 되고 싶다면 경원동샵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 김성호
 
서점 넘어 오프라인 플랫폼? 이 서점의 야심

전국 여러 독립서점을 돌며 느꼈던 건 서점 대부분이 수익구조를 창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단 점이었다. 서점가로 책을 떼와 팔아도 몇 천 원이 남는 게 고작인 상황, 급감한 독서인구와 온라인 구매의 일반화 속에서 독립서점까지 발품 팔아 책을 사는 이들이 겨우 한 줌에 지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고전하는 독립서점들은 커피를 팔고 장소를 대여하고 각종 행사를 열어 근근이 운영하고 있지만 제대로 수익구조를 만든 곳을 꼽자면 다섯 손가락 달린 손만 민망해질 뿐이다.

뿐인가. 독립서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장의 성향이 담뿍 반영된 큐레이션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색깔이 강할수록 손님들이 뭉텅이 째로 떨어져나간다. 그렇다고 색깔을 죽이자니 그럴 바엔 대형서점이며 온라인서점으로 가지 무엇하러 독립서점을 찾겠나. 경원동샵은 책장마다 그 주인들이 가려 뽑은 저마다의 '한 칸'이 자리한다. 그것이 그대로 수많은 취향과 선택의 결집체를 이룬다.

무튼 나는 경원동샵의 운영방식을 기발하다 여긴다. 여유만 있다면 나 또한 서울에 비슷한 가게를 열고 싶은데, 현실적 제약에 그럴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천편일률적인 베스트셀러들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취향과 선택들이 치열한 대결을 펼치는 책장들 사이를 거닐어 보는 일, 경원동샵이 아니라면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경험이다.

나는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 경원동샵에서 내 서점을 열었다. 낙후된 원도심을 일으킬 방법을, 팍팍한 현실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도 그 안에 있었다. 그 결과로써 102동 303호, 잘 보이는 책장 한 칸에 나는 내 책 몇 권을 놓아두었다. 다시 전주에 가게 되면 그 곁에 즐겨 읽는 책 몇 권쯤을 더해 두려 한다. 책장에 붙은 서점 이름은 '#구태여왜서점'이다. 구태여 왜, 하는 물음을 넘어 반드시 읽어둘 책이 이 세상엔 여럿 있기 때문이다. 애정하는 나의 첫 책을 포함하여.
 
▲ 경원동# 서점 입구
ⓒ 김성호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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