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평등'이라니... 신세계와 함께 몰려든 먹구름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해방구였다. 갑오년 동안 전라도가 그랬다. 나쁜 권력의 지배가 아닌 백성의 공간이었다. 나라 행정력이 미칠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평화로웠다.
부족하나마 음식을 서로 나눴고 다투지 않았으며, 도적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위를 챙기며 함께 누렸다. 모두가 어우러져 평등하게 살아가는 대동 세상이었다. 그 실체가 집강소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5월부터 2차 봉기까지이니 불과 반년 남짓이다. 그 이후는 더욱 절박해졌다. 야차(夜叉)처럼 밀려드는 폭풍우를 뻔히 바라보면서, 부득이 항해에 나서야만 하는 배의 선장과도 같은 처지였다.
제 백성을 죽여달라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무능한 권력은, 정작 그 앞에선 고양이 앞 생쥐 꼴이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겨우 문서 몇을 보내 제발 철병해 주십사 읊조릴 뿐이다.
▲ 인천항의 일본군 1894년 5월 9일 인천항에 상륙하는 일본군 모습. |
ⓒ 인천광역시청 |
일본은 음흉한 속내를 즉각 드러낸다. 철병 회담 자체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시위다. 철병을 거부하고 조선 내정에 개입한다. 개혁을 떠벌인다. 심각한 간섭이다. 어떤 방법이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으려 든다. 곳곳에서 침략 본성이 드러난다.
조선은 6월 11일(음) 독자적이며 자주적 개혁을 시행하겠다는 의지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한다. 급한 불을 꺼보려는 고육지책이자 몸부림이다. 개혁하자고 백성이 총검을 들고 전주성을 점령할 때까지 요지부동이던 권력으로선, 경천동지할 일이다.
일본은 간섭을 더욱 노골화한다. 6월 15일 조선 정부에 내정을 개혁하라며 일방적으로 통고한다. 이틀 후엔 시한을 정해 청국과 주종관계를 폐기하라 강압한다. 청나라엔 철병하라 요구한다.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는 포석으로, 동북아 세력 재편을 노린 노골적 야욕이다. 이제 희망은 오직 동학혁명군뿐이다.
처음 겪는 신세계... 우리가 직접 다스릴 수 있다니
전주화약이 이뤄지자 농민들은 신이 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보리 수확이 급했다. 달포 가까이 집을 떠난 객고도 크게 작용했다. 동네마다 어느 해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봄철 농사일을 해내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겪는 경험일 터이다. 이때 농민들이 보고 체험한 건 신세계다. 만인이 평등하단다. 억압과 수탈도 없으며, 백성의 힘으로 스스로 고을을 다스린단다. 이는 동학혁명이 백성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다.
▲ 금성 토평비 동학혁명 당시 민종렬이 나주성을 지킨 걸 기념하기 위해 1895년 나주 관아에 세운 비석. |
ⓒ 이영천 |
하지만 전라도 53개 모든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된 건 아니었다. 나주, 남원과 운봉은 목사와 수령, 지역 토호가 반발하며 막았기 때문이다. 이에 손화중과 최경선이 각각 수천 군사로 광주 인근에서 나주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남원과 운봉은 김개남, 김봉득에게 군권을 주었다.
이때 전라도 각 읍에 다 집강소가 설립되었으나 유독 나주, 남원, 운봉 3곳은 이에 잘 따르지 않자, 전주 대도소에서 여러 번의 격문을 보냈으나 계속 저항하였다. 따라서 동학군 내에서 정벌론이 일어나게 되어 최경선은 나주에, 김개남은 남원에, 김봉득은 운봉에 각기 군을 끌고 출발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2~223 의역 인용)
나주, 남원과 운봉
▲ 나주성 서문 동학혁명 당시 나주성을 두고 혁명군과 관군 사이 전투가 벌어진 나주성 서문. |
ⓒ 이영천 |
민종렬은 집강소 설치를 불허한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여러 번 선전 포고해보나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나주성은 천혜의 지형을 활용한 난공불락 요새로 섣불리 공격했다가 오히려 크게 패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 내내 나주성은 한 번도 혁명군 수중에 들어 온 적이 없다.
이때 최경선이 삼천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성에 이르니, 나주 목사는 각 읍 백성들을 모집하여 성을 지키므로 …(중략)… 어찌할 수 없는 요새인지라, 그러므로 동학군이 여러 날을 두고 싸움을 돋우나 한사코 응전치 않으므로 최경선은 매우 초조한 마음으로 지날 뿐이었다. …(중략)… 옥에 갇혀있는 동학 도인도 수백 명을 넘겨 그저 두고 볼 수도 없는 터이다. 그런 까닭에 동학군은 기어이 싸워서 끝을 내고자 하나, 지세가 험준하고 수성이 견고하므로 동학군은 진퇴양난 중에 있어 해결책이 없이 매우 곤란에 빠진 것이다. (앞의 책. p223 의역 인용)
▲ 남원성 평지에 쌓은 사각형의 성으로, 동학혁명 때 김개남 장군에게 함락된다. 지금 부분 복원 중이다. |
ⓒ 이영천 |
남원은 6월 1일 김개남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모내기를 끝내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차분하게 공격했다. 이내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남원 집강소는 매우 모범적으로 운영되었다.
▲ 남원 집강소 터 당시 남원 관아로 김개남이 집강소를 열었던 곳이며, 지금은 남원문화원으로 사용 중이다. |
ⓒ 이영천 |
동시 김개남은 삼천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향하여 갈 때, 남주송을 선봉으로 삼고, 김중화로 중군을 삼아 바로 남원읍에 드니 남원 부사가 관졸로 방어하였으나 드디어 성을 함락하고 관아를 점령하여 바로 부사 김용헌을 잡아 죄를 따지자, 부사가 굽히지 않아 목을 베어 관문에 달고 방문을 지어 시가지에 붙였다. (앞의 책. p225 의역 인용)
기마술과 검술이 뛰어난 소년 장수 김봉득이 운봉 공격에 나선다. 지리산 인근 분지형 고원인 운봉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운봉으로 통하는 길은 '여원치'라는 고개가 유일하다.
▲ 여원치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 가는 유일한 길목인 여원치. 1894년 당시 박봉양이 민보군을 구성 이 길목을 막았다. |
ⓒ 이영천 |
이 지역 아전으로 부호인 박봉양이 소작인으로 구성된 1천여 민보군을 꾸려 수령과 함께 여원치를 지키고 있었다. 김봉득은 이런 지형을 역이용, 뒤로 돌아 장수 쪽에서 배후를 공격해 운봉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린다.
▲ 박봉양 공적비 운봉읍 서천리 서림공원에 세워진 박봉양 공적비. |
ⓒ 이영천 |
또 김봉득은 삼천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으로 향하니 김봉득의 그때 나이 십칠 세의 잘생긴 청년 …(중략)… 운봉은 태산준령이오, 돌이 많은 좁은 험로였으나, 이를 평지와 같이 뛰어놀며 달려드니 …(중략)… 관아를 습격하였다. 운봉에 있는 대소 관리가 일시에 항복하거늘 이어 군기 등을 다 거두고 옥문을 열어 죄수를 석방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 한 후, 이어 집강소를 설립하고 서정을 베풀었다. (앞의 책. p225~226 의역 인용)
날로 성하는 동학군 기세
이로부터 전라도 오십삼 주는 한 고을도 빠짐없이 모두 집강소가 설립되어 민간의 서정을 집행하게 되었다. 열두 가지 폐정개혁안에 대하여 실행하여 들어가는 데는 어렵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중략)… 전라도 동학군의 기세는 날로 성하여, 동으로는 경상도가 흔들리고 북으로는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까지 뻗쳐 들어가는 형세를 보아 조선에는 장차 큰 변이 일어나고 말리라고 수선거렸다. (앞의 책. p226~227 의역 인용)
집강소 설치 후 얼마간 혼란을 겪고 난 뒤 서서히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바쁜 농사일이 끝난 뒤 논에 김맬 때는 아직 일러, 백성 자치에 대한 재점검과 새 준비가 필요한 시기였다. 신망 높은 두령 등이 각 고을을 돌면서 정책 점검과 부적절한 인사 교체, 강력한 규율을 적용하도록 순회하면서 지침을 내렸다.
이와는 반대로 나라엔 먹장구름처럼 전운이 짙게 드리운다. 여전히 청·일 양국의 위협이 뱀처럼 똬리 틀고 있어, 조정은 이들의 손아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탓이다. 짙은 전운이 조선 하늘을 어둠으로 채워갈 때, 그나마 한 줄기 빛처럼 집강소만 건재했다.
▲ 인천항 청일전쟁이 벌어진 1894년 6월(음) 당시 인천항과 월미도 모습. 일본군은 인천항~한양으로 연결된 루트를 장악, 전쟁에서 우위에 선다. |
ⓒ 인천광역시청 |
혁명군은 이 땅을 침범한 두 나라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대응책에 골몰한다. 폭풍처럼 전쟁은 시시각각 밀려든다.
누가 되었건, 이기는 자의 총구가 동학혁명군에게 겨눠질 것이란 무거운 전망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당시 나라 꼴은 대체로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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