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다시 돌아 고전…‘혼자 읽기 넘어 토의장으로’ [힙한독서③]
아날로그 책 대신 태플릿 PC로 교과서, 소설책 등을 읽는 시대다. 유튜브 동영상도 ‘책 읽기’로 구분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책의 가치를 역설하는 목소리는 높다. 고전 명저와 토의 과정을 통해 독서 경험을 정리하고 많은 사람과 의견을 공유함으로써 생애주기별 전인적 성장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교육계에서 일고 있다.
지난 27일 오후 강원 춘천 시립도서관에서 ‘세인트존스 대학과 함께하는 춘천시 그레이트북스(Great Books) 시범 세미나’가 열렸다. 연령대에 맞춰 정해진 고전을 읽고 이야기를 탐색하고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다. 이날 초등학생부터 중고생,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참석했고, 한국을 찾은 노라 뎀라이트너 세인트존스 대학 총장도 토의 현장에 참관해 눈길을 끌었다.
책만 많이 읽으면 끝? 생각을 키우는 독서 기술
GB 프로그램은 미국 세인트존스 대학과 MOU를 맺은 인천대가 지난 2019년부터 한국형으로 연구 개발한 토의식 교육 프로그램이다. 토의에는 정답도, 다툼도 없다. 토론은 찬반을 나눠 의견을 통해 주장의 옳고 잘못됐는지를 따져 상대방(또는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토의는 의견 교환을 통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방안을 덧붙여 의견을 나누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세인트존스 대학은 전공 구분 없이 인문·자연과학 고전을 읽고 토의하는 교육과정을 두고 있다.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등 고전부터 현재까지 주요 작품을 졸업 때까지 1년에 25권(4년간 100권) 정도 읽고 토의하며 에세이를 쓴다. 튜터로 불리는 교수진은 학생들의 토의 방향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배의 돛’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자유롭게 질문과 답변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학습한 졸업생들은 법률,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 스카우트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졸업생 박사학위 취득률이 전체 상위 2%에 달하며, 한국 학생들에게도 손꼽히는 인기 외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도 이러한 모델이 문해력과 비판적 사고 능력, 문제제기 능력, 창의적 사고, 공감, 협업 능력 등을 키우고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세인트존스 대학 모델을 주목하는 이유다. 지자체도 주목하고 있다. 정부의 교육발전특구로 선정된 춘천시 역시 최근 GB 모델을 도입했다.
이날 시범 세미나는 4개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아동 GB 세미나(초6~중2)는 ‘프랑켄슈타인 축약본’을, 청소년 GB 세미나(중3~고3)는 플라톤의 공화국 제7권 중 ‘동굴의 우화’를 읽고 토의를 진행했다. 시민 GB 세미나(만 18세 이상)는 쇼팽의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 영어 GB 세미나(만 15세 이상)는 Franz Kafka의 ‘The Helmsman’ 내용으로 토의했다.
20명가량이 참여한 아동 GB 세미나는 4~5명씩 소그룹으로 묶어 토의가 진행됐다. 침묵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학교 발표처럼 손을 들 필요가 없었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마치 친구와 대화하듯 떠오른 생각을 그때마다 말하는 식이었다.
중학생 5명이 모인 한 팀에선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 자질로 언급된 ‘영혼’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오랜 대화가 이어졌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자립적인 것”이라는 한 학생의 대답에, 다른 학생은 “뇌의 전기 신호”라고 다르게 접근했다. 그러자 또 다른 학생은 “동물도 뇌가 있는데, 동물도 영혼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해 의견이 꼬리를 물었다.
연령별로 그룹이 달리 묶였지만, 진행방식은 비슷했다. 원형으로 앉은 참가자들은 전체 그룹을 향해 자기 의견을 냈다. 두 명의 튜터가 있었지만 토의 참가자들은 튜터를 통하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수능 중심 한국에서도 성공할까…“현대 시대 복합적인 문제 해결 인재 양성”
“너무 재미있었어요. 학교에선 책 읽고 이런 토론 안 해요. 오히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웠어요.”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어렵고 딱딱한, 재미없는 책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고전이었지만, 중학생들은 ‘재밌었다’고 입을 모았다. 책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읽고 스스로 해석하는 과정도 즐거웠다고 한다. 에밀리 랭스턴 세인트존스 교수는 지난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전 읽기에 대해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세상을 뒤바꿀 정도의 새로운 생각을 해낸 위대한 지성들의 책을 직접 읽고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책 읽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탐색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날 시범 토의는 40여분간 진행돼 시간이 부족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 대학에선 100~120분가량 토의를 진행해 충분한 의견 교환이 가능하다고 한다. 고1 참가자는 “학교에서 토론 동아리 활동을 할 때 말곤 이러한 활동을 한 적이 없다. 재밌었고 또 이런 세미나가 열린다면 참여하고 싶다”면서도 “만약 학교 현장에 도입돼도 (입시에 필요한) 점수를 주는 수업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다”고 했다.
비슷한 의견은 질의응답 때에도 나왔다. 시민 참가자인 교사 한모씨는 “학교에선 책을 같이 읽고 학생들과 질문을 도출하는 과정을 함께하는데 대학에선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에밀리 랭스턴 세인트존스 교수는 “(책을 읽고) 생각을 미리 해보라고는 한다. 다만 수업시간은 (의견을 준비해) 미리 가져와서 풀어내는 시간은 아니다. 강의시간에 ‘첫 질문으로 무엇을 생각하느냐’ ‘대화를 열 수 있는 첫 질문을 던져보면 어떠니’라며 발언을 주저하는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점점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세인트존스는 넓은 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합니다. 또 책을 읽으면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시간에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같은 경험을 하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생각하고 다루면서 복합적인 현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재, 공감하고 사려 깊은 이 시대의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노라 뎀라이트 세인트존스 총장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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