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격노설’ 앞에 놓인 벽…공수처, 돌파 가능할까

이형민 2024. 5. 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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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단장 ‘VIP 격노설’ 주장
이종섭 부인할 시 증거능력 인정 어려워
직권남용 혐의 적용도 까다로운 과제
오동운 신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이 지난 2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공수처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이른바 ‘VIP(대통령) 격노설’과 관련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3차 소환을 검토하는 등 수사 강도를 높이고 있다. 야권은 국방부가 경찰에 이첩된 ‘채상병 사건’ 기록을 회수한 이유로 VIP 격노설을 지목한다. 공수처는 28일 채상병 특검법 부결로 시간을 벌었으나 대통령 격노가 실재했는지, 사실이라면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등 까다로운 ‘법적 허들’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VIP 격노설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31일 대통령실 회의에서 채상병 사건과 관련해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며 격노했다는 의혹이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은 같은 날 ‘경찰 이첩 보류’ 지시를 했다. 해병대 수사단이 8월 2일 지시에 불복해 경찰에 이첩한 기록은 반나절 만에 국방부로 회수됐다. 그 사이 대통령실·국방부·국가안보실과 김 사령관 등 군 관계자들 사이 다수의 통화가 이뤄진 기록을 공수처가 확보하고 수사 중이다.

윤 대통령 격노를 직접 들은 것으로 지목된 이 전 장관은 “들은 적 없다”고 부인한다. 반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김 사령관으로부터 격노설을 전해 들었다는 입장이다. 공수처는 김 사령관에게서 격노설을 들었다는 또 다른 해병대 간부 진술도 확보했다.

공수처 1차 과제는 격노설을 직접 들은 당사자의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박 전 단장 주장은 현재로선 ‘전언의 전언’이다. 이 같은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한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김 사령관이나 이 전 장관이 인정하지 않는 한 VIP 격노설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없는 진술”이라며 “김 사령관과 이 전 장관의 입을 열어야 하는데 이를 돌파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는 최근 김 사령관을 두 차례 소환해 강도 높게 조사했는데, 3차 조사도 검토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확인돼도 직권남용 혐의 적용은 만만찮은 과제다.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직무 권한을 남용해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을 때 성립한다. 법조계에서는 이 전 장관에게는 수사단 업무에 대한 지휘 권한이, 윤 대통령에게는 이 전 장관에 대한 포괄적 직권이 인정된다는 해석이 많다.

다만 격노 수준을 넘어 구체적 지시를 통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점이 확인돼야 직권남용 혐의가 성립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수도권의 한 고법 부장판사는 “대통령이 단순히 사건에 대한 법률적 의견을 물으며 짜증을 낸 것인지, 직접적으로 수사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인지 두 가지 해석이 양립 가능한 상황”이라며 “문제된 발언 정도로는 대통령의 직권남용죄 성립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군내 사망사건은 범죄 혐의 인지 즉시 민간으로 이첩해야 한다는 군사법원법에 비춰볼 때 박 전 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었는지도 쟁점이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해병대 수사단에 수사 권한이 없다고 인정된다면, 수사를 하지 말라는 윗선 지시가 정당한 업무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에 대해 “박 전 단장에게 법률상 독립적 수사 권한이 없고, 수사단장의 고유 권한을 전제로 한 직권남용 범죄는 성립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박 전 단장 측은 범죄 혐의를 인지할 조사 권한이 인정된다고 반박하고 있어서 양측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결국 공수처는 사실관계 파악부터 까다로운 법리 적용까지 모두 돌파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상황이다. 법조계에서는 녹록지 않은 수사지만 철저한 진상규명이 불가피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박 전 단장이 이미 항명죄로 기소된 상황이라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며 “어떤 이유로 갑자기 국방부에서 사건을 회수한 건지 정확한 진상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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