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격노설' 수사 갈림길…채상병특검 폐기, 주목받는 공수처
28일 본회의에서 재표결에 부쳐진 ‘채 상병 특검법’은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특검법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극한 대립과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등 갈등 국면 끝에 공은 다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로 넘어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30일 개원하는 22대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을 1호 당론 법안으로 재추진한다는 입장이지만, ‘특검법 발의→국회 원 구성→상임위원회 논의→본회의 표결→윤 대통령 거부권(예상)→본회의 재표결’ 등의 절차를 원점에서 다시 밟아야 한다.
채 상병 특검법은 채수근 상병 사망 경위 및 책임 범위를 규명하기 위한 수사와 이른바 ‘수사외압 의혹’의 실체 규명 등 크게 2가지로 구성된다. 채 상병 사망 책임과 관련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을 비롯한 지휘관에 대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수사는 경북경찰청에서 맡고 있다. 특검 추진의 배경이자 사건의 핵심 줄기인 해병대 수사단에 대한 대통령실·국방부의 수사외압 의혹은 공수처에서 수사 중이다.
‘VIP격노설’로 탄력받은 공수처 수사
공수처는 최근 이른바 ‘VIP(대통령) 격노설’의 실체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채 상병 사망의 책임자로 임 전 사단장을 지목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에 윤 대통령이 격노했고, 다급해진 용산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조사 결과를 바꾸기 위해 외압을 행사했다는 게 공수처가 의심하는 내용이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 측은 VIP 격노설의 진원지로 지난해 7월 31일 외교·안보 분야 수석보좌관 회의를 지목한 상태다.
공수처는 지난해 8월 관련 의혹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한 이후 약 8개월간은 별다른 수사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며 수사력 부재 비판에 시달렸다. 지난달 중순까진 피의자에 대한 소환조사 없이 압수물 분석만 이어갔다. 지난달 26일엔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을 소환하며 주요 피의자에 대한 첫 조사에 나섰고, 이후 재조사를 통해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를 뒤집은 박경훈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직무대리까지 소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공수처의 수사가 본궤도에 올라간 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 대한 조사부터다. VIP 격노설의 당사자인 김 사령관은 당초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박 대령에게 전달한) 그런 사실이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지난 4일 공수처 조사에선 전면 부인이 아닌 묵비권을 행사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공수처가 김 사령관 휴대전화를 포렌식해 윤 대통령의 격노 사실에 대해 해병대 사령부 관계자와 통화하는 녹취 파일을 복구하는 등 VIP 격노설을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 증거가 구성되자 마냥 부인하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결과로 풀이된다.
공수처가 김 사령관을 압박한 또 다른 카드는 박정훈 대령과의 대질조사였다. VIP 격노설의 양 당사자를 대면시킴으로써 김 사령관의 심리적 동요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다만 김 사령관은 첫 대질을 계획한 지난 5일엔 돌연 공수처에 출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지난 21일 2차 조사 땐 “대질을 시키면 조사실에서 나가버리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며 대질은 무산됐다.
‘윗선’ 향하는 수사외압 의혹
공수처는 VIP 격노설을 징검다리 삼아 국방부 장·차관과 대통령실 관계자 등 윗선으로 수사를 확대하기 위한 분기점에 서 있다. VIP 격노설이 사실로 규명될 경우, 누가 김 사령관에게 윤 대통령의 격노를 전달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특히 김 사령관은 지난해 7월 30일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관련 기록이 8월 2일 경북경찰청에 이첩됐다가 돌연 7시간 만에 회수되기까지 나흘간 국가안보실 관계자들과 최소 16차례에 걸쳐 통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김 사령관과 통화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임종득 전 국가안보실 2차장, 임기훈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 김형래 대령(국가안보실 파견) 등 3명이다. 특히 임 전 차장의 경우 임성근 전 사단장이 혐의자에 포함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기록이 경찰에 이첩됐다가 약 7시간 만에 회수된 지난해 8월 3일에만 김 사령관과 최소 3차례에 걸쳐 통화했다. 이같은 통화내역을 토대로 공수처는 임 전 차장이 경찰 이첩 기록이 회수되는 과정에 개입했는지를 확인할 예정이다.
군 검찰 수사 결과 등에 따르면 김 사령관은 이 시기에 대통령실 이외에도 국방부 등 유관 부처·기관 관계자와 100여 차례에 걸쳐 통화하고 카카오톡·텔레그램 등 메신저를 활용해 수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통화 상대로는 이종섭 전 장관,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 임성근 전 사단장, 박진희 전 국방부 장관 군사보좌관 등을 망라한다. 공수처가 김 사령관을 대통령실-국방부-해병대 간에 이뤄진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연결고리로 보고 있는 이유다.
‘격노설’과 ‘구명설’, 향후 과제는
박정훈 대령 측은 임 전 사단장이 본인을 혐의자에서 제외하기 위한 로비와 구명 활동을 벌였는지, 그 로비의 결과로 윤 대통령의 격노와 수사 외압이 이뤄진 것은 아닌지 역시 공수처 수사를 통해 실체가 규명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VIP 격노설’과 ‘임 전 사단장 구명설’이 수사외압 의혹 사건을 구성하는 두 개의 기둥인 셈이다.
4개월간의 지휘부 공백을 깨고 지난 22일 취임한 오동운 공수처장은 채 상병 수사외압 의혹을 “제일 중요한 업무 중 하나”라고 강조하며 “국민 기대에 부끄럽지 않게 절치부심하겠다”고 말했다.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을 앞둔 이 날 오전에는 김진표 국회의장을 접견하고 “방향을 정해놓고 하는 것은 아니다”며 “증거가 가리키는 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열심히 수사하겠다”고 강조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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