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는 포기 못해... 이 말이 인생 전체를 바꿨다
[조영준 기자]
▲ 다큐멘터리 <비건 식탁>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동일한 주제도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방법도 영향을 크게 미치지만, 대상과 접근 방식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문화나 역사, 사회와 환경 등의 거시적인 주제에 담론을 담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의 반대편에 개인이나 조합, 지역과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미시적인 시선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거대한 움직임은 작은 행동으로부터 시작되고, 개인과 작은 사회의 집합은 다시 큰 협의체가 된다.
영화 <비건 식탁>은 채식주의에 해당하는 비건 문화를 개인과 지역 사회의 움직임으로부터 발견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문화의 역사나 용어의 의미와 같은 어렵고 복잡한 설명 대신 실제로 그 삶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실재하는 문화의 한 모습을 들여다본다. 여기에는 이 삶을 선택한 개인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작은 사회가 있다. 비건의 삶이라는 것이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김문경, 허성 감독은 보여주고자 한다.
02.
"나 버터 너무 좋아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계속 못 먹어?"
이 작품의 중심에는 제주 애월의 작은 비건버터 가게, '문사기름집'을 운영하고 있는 송현애씨가 있다. 그녀가 비건버터 생산이라는 다소 생소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우리 사회가 어떤 대량 생산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고기를 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버터가 문제였다. 매일 아침 무조건 빵과 버터를 먹는 습관이 있었던 현애씨는 버터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자 했다.
▲ 다큐멘터리 <비건 식탁>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비건의 삶이 현애씨에게 채식주의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당장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포장 용기나 종이 상자 같은 경우에도 직접 하나씩 애정을 담아 만들어내는 간결한 삶으로도 표현된다. 그녀 역시 과거에는 큰 공간에서 대량으로 무엇이든 갖춰서 하는 일들이 좋았는데 이제는 스스로도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변하고 그 속의 자신 또한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제주에까지 내려오게 된 배경에는 몇 년 전 겪었던 잊지 못할 사건 하나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에서 세입자가 을(乙)질을 했다며 오해받고 손가락질 당하며 공중파 시사 프로그램에도 수없이 취재되었던 사건, 그 중심에 현애씨가 있었다. 완전히 뒤바뀐 환경 속에서 이제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때 겪은 일들로 인해 당시의 감정이나 표정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어려운 마음이 된다. 어쩌면 비건의 삶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받아들인 자연스러운 변화인지도 모른다.
04.
"이 세계는 마이너 할 수도 있지만 안전하고 편안하고 서로 해 끼치지 않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있는 세계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이제 그녀의 걸음은 자신만을 향해 있지 않다. 제주에서 생산된 재료를 갖고 비건버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후부터다. 지역의 농업이 지속되려면 최소한 제주도에서 생산된 재료가 섬 안에서 모두 소비되어야 한다는 로컬 푸드 마켓의 지향점과도 상통한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되더라도 육지의 힘을 빌리는 일 없이 자체적으로 건강한 생산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타이거넛츠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 다큐멘터리 <비건 식탁>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다큐멘터리 <비건 식탁>은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계몽하는 종류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어딘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그 삶을 담담히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스스로가 원해서 걸어온 길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과정에서 또 다른 길이 보이고 뜻이 열리고 있을 뿐이다. 그 안에서 현애씨가 했던 것은 치열하고도 씩씩하게 자신의 내면을 속이지 않고 나아가는 일이었다.
이 영화가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식탁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가 아니라, 그 식탁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하는.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의 풍성한 만찬일지도 모른다. 비건이 아니어도 좋다. 단정하고 단출한 삶의 태도 또한 여기에 있으니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일곱 번째 큐레이션인 '도시에서 산다는 것'는 5월 16일부터 5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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