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1세로 눈을 감다
[김삼웅 기자]
▲ 평생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섰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
ⓒ 연합뉴스 |
강만길은 나이가 들어서도 육체는 쇠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노쇠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지식인의 전범으로서, 한결같이 고고한 역사학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의 시간'도 세월의 풍화작용은 어찌하지 못했다. 피조물의 한계였다.
2023년 6월 23일, 강만길은 향년 91세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2003년 6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 |
ⓒ 권우성 |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를 기억하려는 이들의 추모의 말 중 몇 개를 소개한다.
말년에 고인은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을 설립해 <내일을 여는 역사>를 발행하면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고인은 "늙을수록 욕심이 많아진다는데 이거야말로 금물"이라고 말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변하고, 쓸데없이 노여워하고, 젊은이를 훈계하려 하고, 세속적 권력을 밝힌다. 그래서 후학들에게 쓴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역사와 민족과 평화통일의 소신을 지켰으며, 후학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을 했다. 모든 일에서 떠나 말년을 바닷가에서 보냈던 고인은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통일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그는 속초 바닷가에서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기러기를 바라며 부러워했을 것이다. (주석 1)
선생은 대학원생의 경제적 처지를 잘 알고 여러모로 지원한 분이셨다. 예나 지금이나 직업으로서 대학원생, 특히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의 생활 여건은 어렵기 마찬가지겠지만, 1980, 90년대는 사실상 장학제도도 없어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은 더욱 빠듯했다.
이를 잘 아셨던 선생은 관행으로 이어지던 별도 학위논문 심사비를 받지 않고 돌려주셨다. 그리고 처지가 어려운 학부생들의 등록금을 마련해 주고, 대학원생의 심사비나 연구를 지원한 일들을 자랑삼아 말씀하시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자료조사차 미국에 갔을 때 나이 지긋한 선배로부터 선생께서 학부 등록금을 마련해 주어 졸업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기도 했다. 어찌 이뿐이랴. 선생은 당신이 쓴 모든 저서의 인세도 2007년 설립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에 모두 넘기셨다. (주석 2)
선생님은 역사를 인간의 고투 속에서 변화하고 진전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강조하여 이를 학문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선생님께 배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가르침은 역사학자는 현실 문제에 외면하지 말아야 하나, 철저히 자신의 학문적 성찰을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은 항상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변화를 말씀하시며 역사학자로서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몸소 20세기 고난의 한국 근현대사를 직접 겪었으면서도 21세기 한반도 평화와 통일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 세상이 열리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학문적 열정을 다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시민과 소통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석 3)
강만길 선생님은 한 톨의 티도 남기지 않는 자랑스러운 삶을 살았다. 비록 선생님의 심장은 여기서 멈추지만, 선생님의 학문적 성과와 통일에 대한 열정, 민족을 생각한 정신은 오히려 더욱 힘차게 뛸 것이다. 고인이 민족통일운동사에 남긴 큰 족적은 분명 민족통일에 큰 주춧돌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의 추도글은 애도가 아닌 존경과 축하로 마무리한다. 강만길 선생님의 용기 있고 영광스러운 삶은 축하받아 마땅하다. (주석 4)
학자가 이른바 '대가'라 부를 정도가 되면 자신을 중심으로 무슨 무슨 학과니 하며 줄을 세우기 십상이다. 하지만 선생은 오히려 제자가 지도교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좋게 보지 않으셨다. 자신의 역사학은 이것이니 따라 배우라고 말씀한 적도 없다. 그 대신 제자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역사학자가 되기로 했으면 사학사에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을 동원하거나 부담을 주는 일을 매우 꺼리셨다. '강만길 저작집'의 발간비용조차 선생께서 전부 부담했다. 제자들은 너무 송구하여 발간을 도왔을 뿐이다. (주석 5)
강만길은 시대마다 역사 변화의 맹아를 찾고 그 싹을 틔우면서 사료와 문학적 표현력을 동원하여 각종 사론과 칼럼을 썼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기도 하고, 좌파로 내몰림 당하기도 하면서 통일의 역사 위에 작은 디딤돌의 역할이라도 하고자 했다. 역사의 현재성과 대중성을 확보하고자 역사 전문 계간지를 창간하고 사비를 털어 젊은 학자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는 사학자와 지식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결한 삶을 살았고, 앎과 삶을 일치하려고 힘썼다.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았으나 세속적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노정이 한결같되 날로 새롭고 멈추지 않았고 그렇다고 서두르지 않고 고이지도 않았다. 격동의 시기에 흔들림 없이 일관된 가치를 추구하며 품격 있게 살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고인은 '역사가의 시간'을 조급함이나 성급함이 없이, 느긋하고 유장하게 살다 간 '역사가'이다. 맑은 이름이 세간과 학계에 오래 전할 것이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1> 원희복, <강만길 교수의 삶을 '축하'한다>, <민족화해>, 2023년 7·8월호.
2> 허은, 앞의 책, 350쪽.
3> 윤경로, <낙천적 자세로 역사 큰 흐름 보셨던 실천적 역사학자셨죠>, <한겨레>, 2023년 6월 26일 자.
4> 원희복, 앞의 책.
5> 허은, 앞의 책, 25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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