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교사들이 혀를 찬 교육감 '칭송 영상'
[서부원 기자]
▲ 지난 24일 내부 체육 행사에서 '이정선 교육감 칭송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광주광역시교육청 직원들. |
ⓒ 이정선 교육감 페이스북 |
존경하는 이정선 교육감님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교육감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낯 뜨거운 영상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솔직히 아이들이 알까 걱정될 만큼 적이 민망한 내용이었습니다. 교육청 주관 체육 행사의 한 꼭지로, 공보팀의 '열정'과 '헌신'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지난 24일에 치러진 광주광역시교육청 직원 체육대회 행사 '2024 모두라서 좋은데이'가 여러모로 입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당장 교육청의 주거래은행인 농협은행에서 행사를 후원한 까닭에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가 불거졌습니다(관련기사: 광주교육청 직원 행사에 농협 후원 "이해관계 업체인데").
법률 위반으로 판명되면 응분의 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법률에 문외한이라 그걸 두고 왈가왈부할 깜냥은 못 됩니다. 다만, '교육감 칭송 퍼레이드' 논란을 빚은 해당 영상의 내용이 하도 참담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무례를 범합니다.
일개 교사에게 교육감님은 주상과 같은 존재입니다. 삐딱한 성정 탓일지는 모르지만, 해당 작품은 직속상관을 향한 하급 공무원의 '역대급 아부 영상'으로 기록될 듯합니다. '웃자고 만든 것에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라고 눙칠 수만은 없습니다. 이 영상을 본 동료 교사마다 해도 너무한다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심지어 설마를 되뇌며 조작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소품을 준비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들었을 거라면서, '아부'가 공보팀의 주요 업무냐며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논란이 되자 공보담당관은 '교육감을 칭송할 의도는 없었고 오히려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풍자해 직원들에게 웃음을 주고자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 추태입니다. 더욱이 이곳은 '민주주의의 성지' 광주 아닙니까.
교육청 주관 체육 행사라면, 마땅히 소속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자리여야 합니다. 주말이 아닌, 주중의 하루를 할애한 것도 그들을 위한 배려일 겁니다. 만약 주말에 행사를 연다면, 반발이 터져 나올 게 불 보듯 환합니다. '모두라서 좋은 데이'라는 현수막 문구에서도 행사의 취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 속 행사의 주인공은 단연 교육감님이십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마 '교육감 취임 축하 공연'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얼굴 사진 가면을 쓴 채 교육감님 역할을 하는 직원 말고, 차라리 교육감님이 직접 영상에 출연했다면 덜 기가 막혔을 것 같습니다. 단상에 앉아 '퍼레이드'를 박장대소하며 지켜보셨을 걸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저는 아직 믿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감님이 정치인이 아니라, 교육자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의 총장 출신으로서,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 개혁에 대한 사명감이 확고한 분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랬던 제 믿음이 이 '웃픈' 영상 하나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외람됩니다만, 어쩌면 교육감님 스스로 직원들의 '아부'와 '책무'를 혼동하고 계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화제가 된 영상은 교육감님께서 다름 아닌 당신의 소셜미디어에 직접 올리신 겁니다. 교육감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직원들이 저렇게나 많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자마자 해당 영상은 삭제됐습니다. 영상의 내용이 얼마나 천박하고 황당한 것인지 사전에 누구도 깨닫지조차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교육감이란 지역의 교육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직책일진대, 광주 교육의 민낯을 드러낸 것만 같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아는 한, 교육청 직원들은 풍부한 교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유능한 정책 전문가 집단입니다. 그런 그들이 교육감님의 '호주머니 속 공깃돌'을 자처하는 모습이 참담합니다. 영상에서 드러난 공보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금 교육청의 내부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상적인 조직이라면, 이런 퍼포먼스가 준비될 때 제지가 됐어야 합니다. 만약 누구 하나 '뒤탈'을 예상치 못했다면, 그 자체로 문제입니다.
적어도 교육감님을 비롯해 교육청의 직원이라면, 현장의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지위 고하를 떠나 직원들이 교육감님과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교육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아무 때나 교육감님을 찾아가 토론을 청하는, 문턱이 없는 교육청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영상을 봐 버렸습니다. 한 동료 교사는 "광주 교육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냐"며 한숨을 내쉬었고, 어떤 이는 "이정선이 이정선한 것일 뿐"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이들의 탄식과 분노를 달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교육감님뿐입니다.
교육감님께선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광주 교육'을 표방하셨지만, 당장 그 아이들을 만나야 할 교사들이 하나둘씩 교육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습니다. 정책 역량은커녕 기본적인 공감 능력마저 상실한 것 같다는 볼멘소리까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한 동료 교사의 질문 같은 혼잣말에 교육감님께선 어떻게 답하실지 궁금합니다.
"다른 때도 아니고 5.18 민주화운동 추모 주간(5월 18일~5월 27일)에 저러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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