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The buck stops here? 아니면 말고
이달 초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집무실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할 때,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2년 전 선물했다는 바로 그 팻말이 책상 위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재임 중 집무실 책상에 뒀다는 그 문구다.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엄중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욕먹더라도 할 일은 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선의는 잘 알겠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꼭 일치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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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 비판 거세면 그냥 없던 일로
장관은 희생양, 대통령은 해결사
책임 미루지 않는 당당함 아쉬워
」
2022년 ‘바이든-날리면’ 논란에서 확인된 건 윤 대통령의 말하기 습관뿐이다. 그의 발언이 미 의회 얘기인지 한국 국회 얘기인지, 쪽팔린 게 바이든인지 윤 대통령인지 온 국민의 청취력 테스트 결과는 “잘 모르겠다”였다.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졌지만 대통령은 속 시원하게 해명하지 않았다.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정부 정책에 반발이 커지거나 혼선이 빚어지면 대통령이 ‘최종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공들여 추진하던 정책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됐다. 여론을 수용하는 정책 공감 능력이 좋아서가 아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면피성 무책임 행정이 많았다.
지난해 3월 고용노동부의 노동시간 개편 발표가 그랬다. 대선 공약이었고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도 올라 있던 주 52시간제를 현실에 맞게 보완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최대 ‘주 69시간’까지 장기간 근로가 가능하다는 극단적인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 근로자 대표의 서면합의와 근로자 본인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차피 노조가 반대하면 기업 단위에서 도입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결국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했고, 노동자 선택권을 넓히는 노동개혁은 스톱됐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22대 국회의 입법 과제로 가장 애타게 요구하는 정책이 주 52시간제 유연화 등 근로시간제 개선(38.9%)이다. 정부는 지금 경사노위라는 사회적 대화 기구 안에서 근로시간 개편의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이미 정책 추진력을 상실한 건 아닌지 걱정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진즉에 더 책임 있게 나섰어야 했다.
직구족의 분노로 사흘 만에 뒤집힌 해외 직구 차단도 ‘아니면 말고’였다. 국내 인증(KC)을 받지 않으면 해외 직구를 금지한다고 보도자료에 분명히 명시돼 있는데 총리실은 설명 부족으로 오해가 빚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번엔 국민의 문해력을 테스트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놓치지 않고 ‘바이든-날리면 2탄’이라는 논평을 냈다. ‘바이든-날리면’은 옛 얘기가 아니라 야당이 수시로 소환해 써먹는 꽃놀이패가 됐다.
대통령과 용산이 정책의 최종 컨트롤타워임은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책 조정은 정책이 발표되기 전에 할 일이다. 용산이 모른 채 주요 정책이 발표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면서도 여론이 나빠지자 뒤늦게 해결사로 나섰다면 부처와 장관을 희생양이나 소모품처럼 여기는 것이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했던 부처 위주의 국정 운영이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아 2019년 1월 연방정부 기능이 일부 정지되는 사상 최장의 셧다운 사태가 벌어졌다. 기자가 트루먼의 유명한 문구에 빗대 트럼프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이번 셧다운은 대통령 책임(the buck stops with you) 아닌가?”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트럼프가 답했다.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야(The buck stops with everybody).”
윤 대통령은 요즘 트루먼 팻말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오늘 국회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에 나선다. 대통령은 채 상병 죽음과 자신의 격노설로 벌어진 이 사태에, 또 그가 강조했던 연금·노동·교육개혁에 어떤 책임을 지고 있을까. 적어도 나중에 트럼프 같은 무책임한 답변은 듣고 싶지 않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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