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시대 비틀어보고 싶었다”…50년만에 재해석한 ‘활화산’
“우리는 죽은 화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화산입니더.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더. 가난을 몰아내야 합니더!”
결의에 찬 정숙의 연설에 장내는 숙연해진다. 이씨 집안의 막내며느리 정숙은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 인물. 축산조합장 선거를 말아 먹고 집안을 거덜 낸 남편을 보다 못해 손을 걷어붙이고 나서 돼지를 키우고 나무를 심고 밭을 일궜다.
국립극단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활화산’(연출 윤한솔)을 50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지난 24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활화산’은 새마을 운동의 모범이 되었던 실존 인물의 활약상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해랑 연출, 손숙·신구 주연으로 1974년 초연한 작품이다.
배경은 1960년대 말 경상북도 벽촌이다. 정숙은 부잣집이라는 말에 속아 시집간 이씨 집안은 이미 껍데기뿐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정숙은 한복을 벗고 초록색 작업복을 걸친다. 양반집 며느리가 돼지 똥을 치운다는 세간의 수군거림에도 개의치 않는다. 급기야 돼지 공동사육장을 만들고 농장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며 마을의 실질적인 리더가 된다.
‘활화산’은 새마을운동을 홍보하는 선전극이었다. 1974년 문예 진흥 5개년 계획에 따라 이근삼·천승세·오태석 등 극작가들이 ‘새마을 연극’을 집필했다.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인 극작가 차범석(1924~2006)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차범석이 쓴 동명 원작을 윤한솔 연출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윤 연출은 27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마을이 점차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휩싸이고 새마을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주변 인물들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다리를 저는 이씨 집안의 둘째 아들 상만이나 술장사를 하는 인천댁이 그렇다”며 “관객들이 ‘이 광기는 뭐지?’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지?’ 하는 질문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차범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과도 같았을 ‘관제’ 연극을 택한 이유로 “연극이 프로파간다로 쓰였던 시대를 비틀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숙이 자립·자주 정신을 강조하며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무너진 다리를 복원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2막 후반부가 절정이다. “하면 된다” 정신으로 “고되더라도 우리 손과 우리 마음으로 일하자”고 소리치는 정숙의 열정적인 연설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반대하던 주민들도 귀신에 홀린 듯 “옳소”를 외친다. 녹색 조명이 무대를 뒤덮고 세상 모든 것이 녹색이 된다. 마을 주민이 하나 되는 ‘아름다운 현장’에 반동분자의 자리는 없다. 윤 연출이 이 작품을 “호러물”이라고 칭한 이유다.
정숙이 구습으로 고통받는 며느리(1막)에서 새마을운동의 지도자(2막)로 성장하며 극의 분위기도 확연히 바뀐다. 1막이 1970년대 사실주의 연극이라면 2막은 현대적 패러디극이다. 다만 마을 주민을 도울 수 있으면 그만이라며 부녀회장 자리도 마다하던 정숙이 돌연 정치 선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은 다소 갑작스럽다. 공연은 다음 달 17일까지 명동예술극장.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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