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 미술이라니…한국 구상회화의 재발견
각진 백자 화병에 꽂힌 ‘백일홍’(1970)은 54년이 지나도 차분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캔버스 결이 보일 정도의 잔잔한 붓질로 그린 ‘국화’(1958)는 전시장 들머리에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도상봉(1902~77)은 곧 시들어 없어질 꽃에서 지고지순한 이상미를 찾았다. 도상봉의 작품 16점이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관에 전시됐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다.
도상봉은 국내 서양화가 1세대다.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창설해 이끌어 나가며 새로운 나라의 미학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내가 평생 추구해 온 미술의 세계란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서양화의 정통을 세우려는 것, 한국 서양화의 아카데미즘을 정립해 보려던 것”이라고 돌아봤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구상미술은 당시 대중의 취향을 이끌었고, 한국 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추상화가 한국 미술의 대세가 되면서 구시대의 미술로 여겨지기도,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찌감치 파리에서 서양화를 배운 이종우(1899~1981)의 토로도 아카데미즘을 평가절하하는 세태를 보여준다.
“나도 야수파처럼 아니면 표현파처럼 멋들어지게 쓱싹쓱싹 휘갈겨 그리고 싶기는 하지만, 역시 그림이라는 건 반듯해야 하고 질서가 있고 너무 지나치게 원색으로 과열되지 않는 색 면을 지닌 화풍이 내 분수에도 맞고 우리 한국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더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러한 화풍을 아카데미즘이라고 한다는 거야.”
어떤 화가들은 여기에 평생을 건 끝에 자기만의 그림을 남겼다. 박고석(1917~2002)은 “우리 풍토와 체질에서 공감”하는 회화가 우리 미술이 지향할 방향이라 여겨 전국의 명산을 여행하며 툭툭 끊듯이 그은 선들로 우리 산세를 속도감 있게 그렸다. 겨울 설악산에서 조난을 당하고도 “십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행운”이라고 했을 정도다.
방탄소년단(BTS) RM의 소장품으로도 잘 알려진 윤중식(1913~2012)의 그림도 여러 점 출품됐다. 평양 출신으로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마티스의 제자였던 나카가와 기겐에게 배운 그는 아내와 큰딸은 고향에 둔 채 막내 여동생과 아들만 데리고 월남했다. 여동생은 굶주려 사망하고, 아들과 단둘이 살았다. 노을 지는 전원 풍경을 즐겨 그려 ‘석양의 화가’라 불렸다.
재료비가 부족해 미군 천막을 캔버스 삼아 그린 김태(1931~2021)의 회화도 대거 기증돼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김태는 생선을 줄에 엮어 해풍에 말리는 건어장 풍경을 즐겨 그렸다. 생전에 “어촌에서는 서당 수업료를 어물로 대신하곤 했다. 펴서 말리는 물고기가 새가 날아가듯 신기해 보였다”고 돌아봤다.
오지호·김인승·박수근·장욱진·전혁림 등 33명의 15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에 이건희 컬렉션은 104점이다. 전시는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이 토대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 1560점 중 기증품은 55.6%로 절반이 넘는다. 2018~2020년에는 연간 기증작이 두 자릿수였는데, 2021년 이건희 컬렉션 1488점 외에도 개인소장가(동산방 박주환 전 대표)와 작가·유족 등으로부터 536점이 들어왔다. 이후 2022년 117점, 2023년 297점 등 증가세다.
윤중식의 그림 20점을 기증한 아들 대경씨는 “이건희 컬렉션이 전국을 순회하는 걸 보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태의 작품 38점을 기증한 아들 수정씨도 “예술 작품의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이 감상할 때 발생한다”며 “미술관에서 전시될 때 아버지의 컬렉션이 한 세트가 되어 보기 좋은 모습이 되도록 (기증작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성인 2000원.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60만원 다이슨 베끼고 당당하다…'4만원 짝퉁'의 노림수 | 중앙일보
- 차두리, 두 여성과 '내연 문제 고소전'…"아내와는 13년째 별거" | 중앙일보
- 헤어진 불륜녀에 “집 주겠다”…남편의 유언 못 막는 까닭 <下> | 중앙일보
- "호중이 형, 경찰 X밥 아냐…변호사가 안 알려줬어?" 경찰글 화제 | 중앙일보
- "아들이 먹던 김밥서 녹슨 칼날 나와…가게에선 진상 취급" | 중앙일보
- '파묘' 정윤하, 암 투병 고백 "1년 지나 재발…더 많은 생각 든다" | 중앙일보
- 박명수도 "남 가슴에 못 박지 마"…구독자 18만 날린 피식대학 | 중앙일보
- [단독]"CCTV 9대, 현관엔 없었다"…강형욱 해명에 PPT 반박 | 중앙일보
- "전세계 딱 100개뿐"…손흥민에 준 지드래곤 '한정판 선물' 정체 | 중앙일보
- 간병일 끊기고 알바는 잘렸다…의료공백에 엮인 '을의 눈물'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