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보이스] 스승 김대감
학창시절의 나는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였다. 중학교 땐 부적응이 극에 달한 나머지 매일 아버지와 다퉜다. “나 안 갈래” “네가 의무교육을 다하지 않으면 내가 감옥 간다” “그럼 아빠가 나 대신 학교 가” “그게 출근하는 애비한테 할 말이냐?”40세 아버지와 14세의 나는 무가치한 밥상머리 싸움에 자주 힘을 뺐다. 사이가 나쁨에도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를 챙겼다. 뺀질대는 둘째 딸을 직접 등교시켜야 안심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내 취미는 탈주였다. 시무룩한 얼굴로 발을 질질 끌며 걷다가 아버지의 차 꽁무니가 사라질 때쯤 민첩하게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땐 내가 원숭이띠인 것도 조금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담을 잘 탔고, 그러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우끼끼’ 웃어넘길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사람보다 꼬마 유인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용돈을 바닥내고 교실로 돌아가면 수업 몇 개는 이미 날아가 있었다. 학교는 내 행동을 ‘무단지각’으로 보고 내가 늦은 시간만큼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 어떤 날엔 가장 늦게 가는 선생님보다 더 늦게 나머지 공부가 끝났다. 지금은 어림도 없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온건한 처사였다.
엄밀히 말해 난 지각생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각생들과 어울렁더울렁 섞여 반성문을 쓰고 놀았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을까? 곧 지각생들은 몰려 있지 못하게 격리 수용됐다. 독방에 갇혀보니 학교가 감옥에 비견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 난 흰 벽과 마주 보며 딜레마라는 개념을 배웠다. 학교에 오면 내가 직접 갇히고, 학교에 안 오면 아빠가 이런 데 갇히는구나. 이러니 학교생활만 잘해도 효도라는 모양이었다. 깨달음에 이른 나는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효도고 나발이고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꼭 갇혀야 한다면 나보다 훨씬 더 ‘애티튜드’가 좋은 아버지를 추천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제물로 삼을 순 없으니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방과 후 징역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시간이 아주 지루하다는 거였다. 난 나름 베테랑이라 반성문 쓰는 속도가 빨랐다. 소일거리가 순식간에 동나버린다는 얘기다. 공부 같은 건 선택지에 없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만화책을 떠올렸다. 아직 대여점 문화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권당 300원만 내면 누구나 재미있는 만화책을 1박 2일 대여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아침마다 나머지 공부 시간에 볼 만화책을 미리 빌려왔다. 읽을거리가 생기니 은근히 저녁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만화책은 몇 장 펼치기도 전에 감독 선생님께 적발됐다. 하루는 운이 나빴다. 매일 바뀌는 감독 선생님이 그날따라 하필 ‘김대감’이었다. ‘김대감’이란 그 선생님이 나만 보면 조선시대 천것 보듯 호통치는 데서 영감을 받아 내가 지은 별명이다(물론 본인은 몰랐다). 김대감은 만화책을 압수하며 “네가 정녕 미친 것 같으니 반성문을 더 써야 한다”고 으르렁거렸다. 영락없이 깊은 절망을 느꼈다. 욕먹어서가 아니라 반납이 안 되면 다른 만화책을 대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권당 100원씩 일일 연체료도 물어야 했다.
만화책 반환이 시급해진 나는 부랴부랴 항복의 언어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적다 보니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소녀들에겐 종종 눈알이 도는 때가 온다. 짜증과 당황, 분노, 민망함, 무력감 같은 것들이 뒤섞여 소녀 모양의 불도저로 변하는 시간 말이다. 처음 애절한 호소로 운을 뗀 반성문은 갈수록 다중인격자가 쓴 것처럼 울고 웃고 화내고 난리치는 글로 변해갔다. 내가 보기에 그 반성문은 부적절한 종이 낭비였다. 너무 되바라진 데다 결과적으로 반성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감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이상한 건 원숭이 잡문에 대한 그녀의 소감이었다. “와, 너 나중에 작가 하면 되겠네. 장난 아니다, 야.”나는 내내 어리둥절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말이 칭찬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여태까진 아무도, 그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 내 미래를 긍정적으로 점쳐 본 적 없었다. 수많은 어른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다그치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뭐’ 속에 내 몫은 없어 보였을 것이다. 나도 마음속으론 동의하고 있었다. 책상에 몇 시간 앉아 있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직업이 주어질 것 같진 않았다.
바로 그때 김대감의 한 마디가 오랜 체념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 후로 물음표가 많이 붙는 대답이 가능해졌다. “그러게요, 저는 커서 뭐가 될까요? 어쩌면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적어도 한 명은 내가 작가가 돼도 좋다고 여기는 것 같으니까요.” 나는 뻔뻔해지면서 희망을 배웠고, 희망에 먹이를 주면서 그것이 별로 사납지도, 두렵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 김대감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예쁜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글도 보여드리고 싶다. 저는 정말 작가가 됐는데, 덕분인 것 같다는 고백과 감사 인사도 함께.
정지음 작가 싫은 것을 사랑하려고 글을 쓴다.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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