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남을 가치 [김선걸 칼럼]

김선걸 매경이코노미 기자(sungirl@mk.co.kr) 2024. 5. 2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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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동안 인기를 이어온 영화 ‘007 시리즈’나 ‘마블 시리즈’는 주인공이 바뀌어도 버전을 바꿔가며 계속된다. 스토리의 뼈대인 고유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아이코닉한 대사를 읊조릴 때, 10대 때 동경했던 007의 추억이 소환되는 식이다. 스토리에는 제작자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세계관’으로 표현된다.

‘호모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문명을 수천 년 지속한 동력으로 이런 추상적인 가치를 이야기로 만드는 힘을 지목했다. 종교, 국가, 돈 같은 ‘공동의 신화’를 창조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이 ‘공동의 신화’는 가치 체계가 공감되고 강력할수록 영속성이 강하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순간의 본능에 그치지 않고 이처럼 가치를 공유하고 영속성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흔히 기업의 목적을 ‘이윤 추구’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필요조건일 뿐이다. 한두 해 많은 이윤을 얻더라도 바로 망해버리면 기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재투자를 하고 좋은 인재를 고용해서 계속 발전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영속성이다. 결국 우리가 ‘우량 기업’이나 ‘선진 국가’라고 지칭하는 곳들은 모두 훌륭한 가치와 문화를 바탕으로 지속가능성, 즉 영속성을 높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병철 회장,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삼성이나 애플이 영속하는 것은 견조한 기업 문화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삼성의 후계자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의 혁신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팀 쿡은 워치·에어팟 등 혁신 상품과 서비스로 명실공히 세계 정상 기업을 이뤘다. 한 단계씩 성장시키며 더 강력한 기업 문화를 구축했다.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짐 콜린스의 책 ‘Good to Great(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는 ‘업무보다 사람 먼저(First who, then what)’ ‘규율의 문화(Culture of Discipline)’ 등 기업 문화가 자리 잡는 메커니즘을 역설한다. 영속적이려면 이런 가치와 문화가 필요하다.

개인이라고 다를까. 한국 최고의 기업을 일궈놓은 이병철 삼성 회장이 폐암으로 투병할 때다. 그는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한경직 목사,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 등 당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구했다. 평생 일궈온 삶의 가치를 사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 같다.

‘최고의 지성’이라 불렸던 故 이어령 장관은 노년에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내고, 치열했던 지적 탐구에서 영혼의 탐구로 삶의 의미를 옮겼다. 그는 “죽음 앞에서 지성은 무력하지만, 영성은 그 죽음을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게 한다”고 적었다. 최근 이 장관 부인인 강인숙 여사가 ‘글로 지은 집’이라는 책을 펴냈다. 64년을 함께한 부부의 주택 연대기다.

이 장관은 암 발병 후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했는데, 남겨야 할 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의 연장보다 가치를 남기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일까.

지난주 존경하던 한 선배가 유명을 달리했다. 암 투병 중 가족이 질문했다고 한다. ‘시간을 되돌려 발병 초기로 간다면 일을 중단하고 치료에 전념하겠냐’고.

그는 그러나 그때로 가도 똑같이 언론인으로서 했던 일을 다시 하겠다고 답했다 한다.

그는 영혼을 믿는 사람이었다. 늘 진실되고 정의로웠던 그의 가치가 우리 곁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수고로웠던 영혼의 안식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주간국장 kim.seonkeol@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1호 (2024.05.28~2024.06.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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