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투척-버스막기', 모욕주기식 축구 팬덤 문화 변해야
[이준목 기자]
K리그는 국내 프로스포츠 중에서도 서포터즈로 대표되는 '열성 팬덤'의 영향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종목으로 꼽힌다. 서포터즈 문화는 K리그의 암흑기 시절부터 척박한 토양 속에서 한국축구를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훌리건'에 가깝게 변질되어버린 일부 팬덤들의 과격한 집단행동이나 잘못된 관행들이 여러 차례 물의를 빚으며 논란에 휩싸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사실 과거에는 팬들의 이런 돌출행동들도 축구 응원 문화의 일부이거나 해프닝 정도로 묵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축구장 응원 문화 역시 달라져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프로축구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는 최근 일부 팬들의 연이은 돌출행동으로 곤욕을 치렀다. 지난 5월 11일 열린 '하나은행 K리그1 2024 12라운드' 인천과 FC서울의 '경인더비' 직후 일부 인천 홈팬들이 단체로 서울 선수들을 향하여 그라운드로 물병을 투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팬이 투척한 물병이 FC 서울 주장 기성용의 하복부 급소를 강타하는 위험천만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 인천에 홈 5경기 응원석 폐쇄라는 징계를 내렸다. 인천 구단 역시 곧바로 사과문을 발표하고 물병을 투척한 팬들에 대한 자체 진상조사에 나섰다. 124명의 팬이 물병 투척 사실을 자진신고했고, 인천은 이들에게 경기장 출입을 무기한 금지하는 징계를 내렸다. 해당 팬들은 구단이 지정한 봉사활동 100시간을 이수할 경우에 징계는 해제된다.
또한 지난 25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인천과 광주FC의 경기를 앞두고 인천 구단은 경기에 앞서 원정팀 광주FC의 라커룸을 찾아가 묵은 갈등을 풀었다. 서울전 물병투척 사태에 비하면 가려졌지만, 지난 4월 3일 벌어진 광주FC와의 5라운드 경기에서 인천 팬들이 퇴장하던 광주 골키퍼 김경민에게 욕설과 위협을 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김경민은 후반 48분 핸드볼 파울로 퇴장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인천 팬들이 김경민이 고의적으로 시간을 지연하는 행위를 했다고 판단하고 분노를 표출했다.
이들은 원정석을 지나던 김경민이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따라가며 차마 입에 담지못할 조롱과 폭언을 지속적으로 퍼부었고 심지어 침까지 뱉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축구팬들이 당시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을 온라인에 업로드했고, 대중들은 가해자를 찾아내어 처벌해야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은 이날 경기를 앞두고 임중용 단장과 인천 서포터즈들이 직접 찾아와서 김경민과 광주 구단 측에 사과의 의사를 전했다. 광주 역시 인천 구단과 팬들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 이날 경기는 물병투척 사태 이후 인천의 응원석 폐쇄 징계가 적용된 첫 경기이기도 했다. 홈팀 관중석이 텅 빈 자리에 구단이 준비한 현수막만 걸려있었다. 현수막에는 "건전한 응원 문화를 만들겠습니다" "RE: United, 다시 인천"이라는 문구들을 통하여 반성과 새 출발에 대한 의지를 담았다. 인천 구단과 팬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오명을 벗고 건전한 응원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편 26일에는 K리그2 수원 삼성에서 또 하나의 안타까운 장면이 발생했다. 5연패의 부진에 빠진 수원의 염기훈 감독이 자진 사퇴를 발표한 것이다. 염 감독은 팀의 부진에 분노하여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고 항의하는 수원 팬들 앞에서 직접 사퇴 의사를 밝혀야 했다.
수원을 대표하는 레전드 출신인 염기훈 감독은, 지난해 감독대행을 거쳐 올시즌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지도자로서는 시작부터 팬들의 반대여론에 직면하며 환영받지 못했다. 수원 팬들은 1부리그 승격을 위하여 좀더 경험많은 감독을 원했으나, 무리하게 초보감독을 밀어붙인 수원 구단과 염기훈 감독의 책임도 피할 수 없었다.
염기훈 감독의 수원은 4월까지만 해도 선전했으나 5월 들어 연패행진에 빠지면서 홈팬들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수원 팬들은 관중석에서 '염기훈 나가' 콜을 외치는가하면, 충남아산과 서울 이랜드전 패배 후에는 연이어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으며 염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염 감독은 결국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이랜드전 패배 이후 구단에 사임 의사를 전했다. 올해 1월 수원의 감독으로 선임된지 불과 5개월만이었다.
'선수단 버스 가로막기'는 최근 K리그에서 부진에 빠진 팀들이라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자리잡았다. 관중석에서 감독 아웃 구호를 외치거나 비난 걸개를 내거는 수준을 넘어서, 팬덤의 의사표현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수위가 높은 집단행동의 수단이다.
지난 시즌부터 올해까지 전북 현대의 김상식 감독, 강원 FC의 최용수 감독, 수원의 이병근 감독 , 대구 최원권 감독 등은 하나같이 성적부진 때문에 분노한 팬들로부터 감독콜과 버스 가로막기를 피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런 팬들의 행동이 언제부터인가 진정으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격려하고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선의라기보다는, 사실상 강성 팬들의 일방적인 '분풀이' 수단이자, 선수와 감독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주기'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감독은 성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도 맞지만, 한편으로 한 팀을 대표하는 리더이자, 축구에 관한 전문가로서 존중받아야하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염기훈 감독은 팬들의 압박에 못 이겨 공식적인 발표도 하기 전에 쫓겨가듯 '길바닥 사퇴'를 선언해야만 했다.
실제로 직전까지 염 감독에게 야유와 조롱을 퍼붓던 팬들은 막상 정말로 사퇴 소식을 듣자 오히려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일부 팬들은 떠나는 염기훈 감독의 선수시절 응원가를 불러주며 뒤늦게서야 최소한의 예우를 보였다. 팀성적을 떠나 여러모로 명문 구단의 품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이별 방식이었다.
물병투척이든, 버스 가로막기든, 그 시작은 축구와 자신이 응원한 팀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정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집착이 지나치면 광기가 된다. 이는 오히려 일반 팬들에게 축구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초래하고 진입장벽을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제는 일반적인 상식을 기준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라면, 축구장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축구팬이라는 핑계로 비정상적인 행동이 축구장에서는 용납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바뀌어야 축구 관람문화도 더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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