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어프렌티스’

김철오 2024. 5. 2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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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국제부 차장

승리 위해 악행 일삼는 트럼프
실체 묘사… 영화가 드러낸
약점은 ‘패배감’ 못 견디는 것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린 영화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는 25일(현지시간) 폐막한 올해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다. 미국 내 배급사와 상영관을 찾지 못해 지난 20일 칸영화제 시사회장에서 처음 공개된 이 영화를 두고 무수한 말이 쏟아졌는데, 당연하게도 트럼프 주변에서 가장 격한 반응이 나왔다.

트럼프 선거캠프의 스티브 청 대변인은 즉각 성명을 내고 극 중 성폭력이나 마약류 복용 장면을 “쓰레기, 거짓말, 가짜 영화 제작자의 허위 주장”이라 비난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트럼프에게 2016년 대선 승리 이후 최소 120만 달러(약 16억원)를 기부한 억만장자 댄 스나이더는 내용을 잘못 알고 이 영화에 투자했다가 뒤늦게 가편집본을 보고 화를 내며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극장에서 8분 동안 이어진 기립박수가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평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놓고서는 사뭇 다른 평가가 나온다. 영국 영화잡지사 ‘스크린 인터내셔널’이 평론가 의견을 취합한 ‘스크린 데일리’ 평점(4점 만점)에서 어프렌티스는 공개 당일 칸 출품작 가운데 가장 낮은 1.7점을 받았다. 평점에 참여한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아예 점수를 매기지 않았고, 그나마 “현실에 매우 근접한 영화”라며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한 미국 주간 타임지는 2점을 주는 데 그쳤다.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배우는 ‘어벤져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 미국 만화 원작의 영화 세계관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윈터 솔저’ 캐릭터로 이름을 알린 서배스천 스탠이다. 이전 출연작과는 다르게 살집을 불려서까지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재현해낸 스탠의 영화 촬영장 사진은 지난해 SNS를 떠돌며 영화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은 영화가 공개되자 스탠이 정치에 개입했다며 야유와 비난을 퍼붓고 있다.

영화 한 편을 놓고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는 살아있는 유력 정치인의 일대기를 비판적으로 다뤄 논쟁을 끌어냈거나 충격적인 악행을 들춰 공분을 일으켰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프렌티스는 대중의 열광을 끌어내는 트럼프식 극단주의, 그래서 이제는 각국의 선거판마다 잘 먹히는 전략으로 악용되는 ‘트럼피즘(Trumpism)’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인 어프렌티스는 수습생을 뜻한다. 트럼프가 성공한 부동산 재벌로 평가됐던 2000년대 “당신은 해고야(You are fired)”를 외쳤던 리얼리티 TV 쇼의 제목도 어프렌티스였다. 같은 제목을 택한 영화는 트럼프가 첫 스승으로 삼은 변호사 로이 콘에게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렸다.

콘은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편승해 연방검사의 길을 걸었고, 정치인들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 주며 악명을 쌓은 변호사였다. 1970년대 20대 풋내기 사업가였던 트럼프를 처음 만나 연을 쌓고 ‘정치적 스승’이 됐다. 콘이 트럼프에게 준 가르침이란 대개 ‘상대를 공격하라’거나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식의 독단적이고 호전적인 태도였다.

콘의 관점에서 사람은 승자와 패자로만 구분됐다. 그 아래에서 성장한 트럼프는 거짓 주장이 들통나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거나 악당 취급을 당해도 타격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의 트럼프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실패뿐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때 트럼프를 ‘전임자’라고 부르며 직접 언급을 피하더니 최근 들어 “루저”(loser·패자)라는 강한 말로 도발에 나선 배경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가 그토록 싫어하는 패배감을 안겨주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바이든의 의지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한때 40%대에서 트럼프를 근소하게 따라잡는 듯했던 지지율이 다시 30%대로 주저앉았다. 7곳 중 5곳에서 밀린 경합주의 열세는 좀처럼 뒤집힐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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