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국가적 인재정책 틀에서 의대정원 문제 풀어야
지난해 9월 과학기술 분야에서 도전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 10개를 도출하고, 그 의의를 해설하는 포럼 시리즈를 개최했다. 참석한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질문과 제안은 놀라울 만큼 날카로웠다. 포럼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종합토론 자리에서 통신공학을 전공하고 있던 박사과정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의대로 간 고교동창들은 이미 사회에 진출해서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지만, 자신은 얼마 되지 않는 연구비에 매일 밤새워 연구실을 지키면서도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를 포함한 교수들은 미안함과 먹먹함에 뭐라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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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대 정원 조정, 교육계 후폭풍
이공계 저학년, 의대 겨냥 휴학
적성 무시한 입시엔 미래 없어
부정적 파급효과 최소화 해야
」
의대 정원 조정 문제가 최대의 사회적 이슈가 된 가운데, 교육계에도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이미 각 대학의 이공계 학부 저학년생들 사이에 휴학생이 급속히 늘고 있다. 고등학생들 가운데도 내신관리를 위해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의 길로 일찌감치 들어서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재수, 삼수를 각오한 입시생들로 의대 전문 학원은 문전성시다. 하나같이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 한두 번쯤 들어본 우수한 학생들이다. 올해 첨단산업 분야의 인재육성을 목표로 문을 연 주요 대학의 신생학과들에서도 신입생 미등록률이 70~90%에 달했다. 소위 ‘스카이(SKY)’ 대학 중 한 곳의 시스템반도체분야 학과에서는 합격자 25명 중 23명이 등록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부분이 의대 중복합격자인 탓에 등록을 포기한 것이라는 기사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국가의 미래, 인재에 달려있어
국가의 미래가 인재에 달려있다는 점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이 자명한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우수 인재들이 하나같이 의대 진학에 매달리고 있는 오늘의 이 현상이 계속된다면, 단연코 한국의 미래는 없다. 고령화시대를 맞이하여 의료 분야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인재가 부족한 곳은 의료 분야만이 아니다. 인공지능이나 반도체, 양자컴퓨터같은 첨단기술 분야도 인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러다가는 한국 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린 지 오래다. 미국과 중국·유럽·일본 등 각국이 미래 분야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등골에 땀이 흐른다. 물리·화학·수학 같은 기초과학 분야의 인재들은 이미 멸종단계의 희귀종이 되어가고 있다. 기초과학의 인재기반이 없는 국가가 결코 국가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인재의 관점에서 선진국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학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처럼 수학을 좋아하는 인재가 수학을 전공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프로그래밍이 너무 좋아 밤새워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드느라 늘상 머리가 부스스하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벤처기업의 창업자로도 성공할 수 있는 사회, 탁월한 디자인 감각을 지닌 인재가 자기만의 디자인 장르를 개척해나가면서 누구 못지않게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회다. 물론 의학에 관심을 가진 인재가 의학을 전공하고 훌륭한 의료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고 모든 우수 인재가 적성과 상관없이 의대 입시만을 바라보면서 몇 년씩 청춘을 유예하고 있는 사회는 결코 소망 같은 사회라 할 수 없다.
종합적 판단 필요한 인재정책
부분균형과 일반균형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도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분야에서 문제가 있을 때 그 분야의 원인과 처방을 생각하는 것이 부분균형이라면, 한 분야의 정책이 다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일반균형적 시각에 해당한다. 의료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대 정원 조정 문제를 논하는 것은 부분균형적 접근이다. 반면 국가적으로 의료분야를 포함해 여러 분야에 인재가 적성에 맞게 고루 진출하기 위해서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를 논의하는 것은 일반균형적 접근이다. 의료분야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공계 학부생의 휴학속출과 의대를 목표로 자퇴하는 우수 고교생들의 행렬은 부분균형의 해법을 찾아 나가는 중간과정 정도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균형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현재 상황은 분야 간 인재의 불균형을 극단적으로 심화시키는 재앙적 사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야의 협회나 단체, 혹은 해당 정부부처는 부분균형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는 여러 분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어우러져 돌아가는 복잡한 생태계와 같다. 국가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제는 필시 일반균형적 시야를 유지해야 한다.
인재 쏠림은 성장 정체의 신호탄
의대 정원 조정 문제와 동시에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주제는 이공계 전반, 나아가 국가적 인재 육성 정책이다. 의료분야를 포함해 우리 사회의 인재가 가야 할 여러 분야 간의 인센티브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파악하고, 의대 정원 조정으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방안이 동시에 강구되어야 한다. 의료분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이 시점에서 다른 분야의 인재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한갓진 소리처럼 들릴까 우려된다. 언제나 그러하듯 정말 중요한 일은 급해 보이지 않고, 그래서 항상 우선순위에서 나중으로 밀려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인재의 쏠림 현상은 머지않아 한국이 겪게 될 만성적인 성장 정체의 신호탄이라는 경각심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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