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보고서' 쓴 울릉군수, 횡성에서 면직된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우리의 땅 독도 |
ⓒ 조정훈 |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도 비슷하다. 그는 또 다른 저서인 <화해를 위해서>에서 한국과 일본이, 또 경상도와 시마네현이 독도를 공동 개발했으면 하는 희망을 표시하면서 "독도가 한일 간에 문제화된 것은 1952년에 한국이 이른바 이승만라인을 선포하면서 독도에 경비대를 보내 한국 땅임을 선언한 시점에서부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심흥택이 살아 돌아오면 얼굴 들기가 민망해질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 훨씬 이전에, 1952년보다 훨씬 이전에 독도 관리에 신경을 쓴 관리가 1855년 태생인 울도군수(울릉군수) 심흥택이었다.
심흥택은 독도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이 내용은 '외교부 독도' 홈페이지의 '심흥택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여기에는 울도군수의 상급자인 강원도관찰사서리 겸 춘천군수 이명래가 1906년 4월 29일 의정부에 보고한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울도군수 심흥택은 그달 4일 시마네현 관헌들이 울릉도를 방문해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가 된 고로 시찰차 방문했다"고 통보한 사실을 강원도관찰부에 보고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인 1905년 2월 22일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사실은 이처럼 울도군수 심흥택을 통해 강원도관찰부에 보고됐다.
심흥택은 초조함을 느꼈던 듯하다. 1906년 5월 9일 자 <황성신문> 기사는 "울도군수 심흥택씨가 내부(內府)에 보고하되"라며 심흥택이 독도에 관한 보고를 중앙정부에 직접 했다고 알려준다. 동일한 보고를 강원도관찰부뿐 아니라 그 상급기관에도 별도로 올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 중앙정부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면서 "섬의 형편과 일본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다시 조사·보고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심흥택의 조치는 일본이 독도를 강점할 당시에 독도가 주인 없는 섬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의 보고는 독도가 방치된 섬이 아니라 관리되는 섬이었음을 알려준다.
▲ 1909년 2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 |
ⓒ 국립중앙도서관 |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증거를 남기는 데 일조한 심흥택은 이듬해에 강원도 횡성군수로 가라는 발령을 받는다. 1907년 3월 16일 자 <황성신문> 기사 '서임급사령(敍任及辭令, 임명 및 인사명령)'은 그가 3월 13일부로 횡성군수가 됐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는 봉변을 당한다. 그해 8월 11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횡성군수 심흥택씨를 본월 7일에 포병이 착거(捉去)라 하얏더라"고 보도했다. 심흥택을 붙잡아간 이들은 7월 31일의 군대해산 조칙에 반발해 봉기한 민긍호 휘하의 원주 의병들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가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민긍호 편은 원주진위대 장교인 민긍호가 8월 5일 봉기한 일을 설명한 뒤 "의병부대는 각기 나눠져 원주 인근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히기 시작하였다"라며 "8월 7일 일부 병력을 횡성으로 보내 횡성군수에게 군수지원을 요청"했다고 기술한다.
횡성군 남쪽과 인접한 원주의 의병들에게 붙들린 심흥택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 8월 16일 자 <황성신문>은 "어떻게 조처함은 미상이거니와 해(該) 군수는 방환이 되얏다더라"고 보도했다. 의병들의 군수지원 요구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군수는 석방됐다는 보도다.
1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심흥택이 붙들렸을 당시에 원주 유림들이 의병들에게 석방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의병부대에서 무사히 풀려난 것과 그 뒤 관직이 무사했던 것을 종합하면, 의병과 정부 어느 쪽도 거스르지 않는 방법으로 심흥택이 처신했으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뒤 심흥택의 행보는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것이었다. 현직 군수 신분으로 횡성·원주 지역의 노동야학을 지원했던 것이다.
2016년에 <역사와 교육> 제22집에 실린 심철기 연세대 강사의 논문 '1907년 원주의병의 쇠퇴와 새로운 항일투쟁의 전개'는 "횡성군수 심흥택은 부임 이래 읍내에 보통소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운동에 적극적이었다"라며 그가 추진한 노동야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현내면 개화리에 노동국문전습소를 설립한 후 한글을 교수하였다. 한글 해독자는 본국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능력별 수업으로 교육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운영비는 자신의 월급 중에서 충당하였으며, 박용좌·정용면·윤두혁 등도 찬성원으로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1909년 2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현내면 개화리에 노동국문전습소를 창설하야 초동목우(樵童牧竪)를 매야(每夜) 회집하야 열심 교수하난대"라고 보도했다. 나무하는 아이와 소치는 아이들을 매일 밤마다 모아놓고 한글과 한국사와 지리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독도에 관한 일본의 동향을 보고한 일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훨씬 훌륭한 일을 군수 심흥택이 했던 것이다.
그가 노동 야학을 지원한 것은 역사적 맥락을 띠는 일이었다. 위 심철기 논문의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횡성·원주 지역 노동야학은 이 지역 의병들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일본을 꺾지 못해 울분을 품은 이 지역 항일진영이 독립운동의 제2라운드로 벌인 것이 노동야학이다. 심흥택이 이 흐름에 동참했던 것이다.
항일운동 차원에서 전개
위 논문은 "원주 의병이 쇠퇴하면서 원주의 의병운동은 새로운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라며 "먼저, 한상렬 의병장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만주·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여 독립군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고 한 뒤에 "다음으로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전개"라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원주의병이 쇠퇴한 이후 원주 일대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이는 원주 지역에서 의병운동뿐만 아니라 자강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주 지역은 억압적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통해 민(民)들이 저항 주체로 성장하였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운동, 야학운동 등 다양한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흥택은 횡성군수 부임 초부터 지역 교육에 열의를 보였다. 그러다가 이웃 고을인 원주에서 의병운동이 폭발하고 이 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야학이 확산될 때 사재를 털어 합세했던 것이다.
이는 심흥택의 노동야학 지원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전개됐음을 의미한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군대해산에 맞선 항일의병운동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때에 그 흐름에 동참했다.
1906년에 심흥택은 일본이 독도를 침탈했다는 보고를 강원도관찰부뿐 아니라 내부로도 올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신속한 대처를 희망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친일파가 급증하던 그 시기에 심흥택은 그들과 거리를 뒀던 것이다.
1907년에 원주 지역 의병부대에 끌려간 심흥택은 얼마 안 있어 무사히 석방됐다. 그런 뒤 원주 지역 항일세력과 보조를 맞춰 바로 옆 횡성에서 노동야학 운동을 벌였다. 1907년에 자신을 붙잡은 의병들에 대해 그가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를 추정케 하는 자료다.
현직 군수 신분으로 노동야학을 지원하는 심흥택의 모습은 박정희·전두환은 물론이고 일본제국주의까지 긴장시킬 만한 것이었다. 그 뒤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니 그의 관운이 좋을 리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대한제국 횡성군수에서 조선총독부 횡성군수로 바뀐 심흥택은 이듬해에 강제 면직됐다.
2010년에 울릉군이 심흥택 후손을 초청한 일을 보도한 그해 10월 22일 자 <경북일보> '울릉군, 초대·3대 군수 후손 특별 초청'은 심흥택의 최후를 이렇게 설명한다.
"심흥택 군수는 횡성군수로 부임해 한일합방을 맞아 일본에 동조하지 않아 면직처분되고 요주의 인물로 지목돼 핍박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생을 마감했다. 또 일본의 방해로 밤에 몰래 장례를 치르고 공동묘지에 매장을 하였다는 사실이 후손들에 의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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