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그 여배우랑 사귀어봐”···남편 불륜을 응원한 여자의 사연 [사색(史色)]
[사색-69] “그 여자와 연애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부인으로부터 도착한 편지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인기 있는 유명 여배우와 사귀어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이 행복하길 바란다면서,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진의를 의심할 수 없는 담담한 필치였습니다.
부인은 결혼생활에 지쳐 있었습니다. 시댁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잘나가는 남편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모든 건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댁 식구들과는 ‘인종’부터 달랐습니다.
가정법원의 막장 판결문에 기록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사 교과서에 쓰인 한 부부의 가정사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로 불리는 엘리자베스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주인공입니다.
시시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역의 옛 지배자 비텔스바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귀족 집안이었음에도 권력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에 평화와 자유로움 속에서 자랐지요. 둘째인 그녀는 귀여움과 애교로 무장한 사랑둥이로 커갑니다.
운명의 장난이 시작됩니다. 황태자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나의 동생인 시시에게 빠져들게 됐기 때문입니다. 키 크고 아름다운 16세 소녀가 황태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지요. 그는 이번 약혼을 주선한 어머니 소피에게 말합니다. “저는 헬레나의 동생 시시와 결혼하겠습니다.”
황실과 시시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이지 못했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시시가 황실의 엄숙주의를 견디지 못했던 탓이었지요. 격식을 크게 중시했던 황실 가문 합스부르크와 17세의 발랄한 소녀는 결코 조화할 수 없었습니다. 황실은 언제나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었습니다.
시시가 시집을 간 1854년에는 제국의 가장 유력한 세력인 헝가리마저 ‘독립’을 부르짖고 있는 시기. 제국은 해체의 위기 속에서 자주 흔들렸지요. 황실 분위기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던 배경이었습니다.
시시의 우울은 짙어집니다. 아이를 낳았지만 자주 볼 수 없어서였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출산’마저 ‘공적인 영역’이어야 했습니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행복마저도 박탈당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 소피로부터 온 걸로 추정되는 메시지였습니다. 황실의 권위자이자 어른인 소피는 그저 자유만을 추구하는 시시를 무척이나 마음에 안들어 했었지요. 불안증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그녀는 점점 야위어만 갔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영혼의 동정심이 이 땅(헝가리)의 사람들에게 손을 뻗었다.”
이 여행을 마친 뒤부터 그녀는 헝가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날 때부터 자유주의자인 그녀는 제국의 이름으로 헝가리를 억압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사람들도 딱딱한 오스트리아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그녀에게 빠져들었지요.
남편 프란츠 요제프가 정서적인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그들이 이듬해 아이를 하나 더 낳을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지만 행복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시가 다시 오스트리아 정계에 소환된 건 1867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제국의 파트너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였습니다. 헝가리의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지면서 황실이 이들에게 유화책을 건넨 것이었습니다.
제국의 명칭도 바꿨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제국의 가장 중요한 일원임을 공식화한 셈이었습니다. 헝가리인들도 엘리자베스 황후를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이같은 제안을 공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헝가리의 승격은 부부 사이에 또 다른 파국을 불렀습니다. 시시가 마음의 안식을 헝가리에서만 찾았기 때문입니다. 무늬만 부부지, 사실상 별거 생활에 돌입한 것과 다름없었지요. 프란츠 요제프는 열정적으로 시시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빈으로 불러올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빈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여배우는 ‘왕관없는 오스트리아 황후’라고 불립니다. 시시는 이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본인이 프란츠 요제프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녀는 이제 여행을 다니고, 지식을 쌓으며,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충격적인 비보가 시시에게 찾아옵니다. 유일한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루돌프가 내연녀와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부남인 루돌프가 18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와 비관 자살이라니.
시시는 모든 고통은 빈에 있다는 듯이, 유럽 전역을 유랑하고 다녔습니다. 수많은 정치인, 군인, 철학자를 만나 그들의 고견을 들으며 지적 유희를 채워야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꿈꾸던 삶이었습니다. 신문은 미의 여신인 오스트리아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합니다.
불화의 시대는 그러나 그녀를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제국은 민족국가 성립을 막는 원흉으로 주목받습니다. 제국의 황후는 그 정점에 선 원수 중 원수였지요.
헝가리인들에게 그녀는 ‘국모’나 다름없던 셈입니다. 지금도 헝가리 곳곳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 마을로 가득합니다. 평소 자선 사업에 관심이 많던 황후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료된 것이었겠지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왔던 그 성품을 시민들은 여전히 추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희귀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모차르트만큼이나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시시의 이야기였습니다.
<네줄요약>
ㅇ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로 통하는 ‘시시’는 언니의 소개팅남이었던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했다.
ㅇ발랄하고 자유로운 시시는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남편에게 ‘불륜’을 권한다.
ㅇ그녀는 헝가리 민중의 삶에 동감하면서 헝가리가 제국의 파트너로 격상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ㅇ20세기 초 민족주의 발흥으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살해당한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운 성품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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