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그 여배우랑 사귀어봐”···남편 불륜을 응원한 여자의 사연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5. 2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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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69] “그 여자와 연애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부인으로부터 도착한 편지에는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인기 있는 유명 여배우와 사귀어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이 행복하길 바란다면서,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진의를 의심할 수 없는 담담한 필치였습니다.

부인은 결혼생활에 지쳐 있었습니다. 시댁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잘나가는 남편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모든 건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댁 식구들과는 ‘인종’부터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스. 애칭 ‘시시’로 통한다.
그녀는 조금씩 남편을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훨훨, 자기 뜻을 펼치며 살아가고 싶었지요. 남편도 그녀의 뜻을 알았습니다. 여배우와 진한 사랑에 빠지며 그녀의 당부대로 살아갑니다. 그녀 역시 멀리서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가정법원의 막장 판결문에 기록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사 교과서에 쓰인 한 부부의 가정사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로 불리는 엘리자베스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주인공입니다.

세계사에 길이 남는 미인으로 알려진 시시 황후의 사진.
엘리자베스는 ‘시시’라는 애칭으로, 여전히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인물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부유했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던 ‘시시’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저 막장인 가정생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상대방 동생에게 빠진 황태자
“우리의 결혼은 우연이었다.”

시시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역의 옛 지배자 비텔스바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귀족 집안이었음에도 권력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에 평화와 자유로움 속에서 자랐지요. 둘째인 그녀는 귀여움과 애교로 무장한 사랑둥이로 커갑니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수려한 외모로 이미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맑고 맑은 소녀로 자란 엘리자베스. 그녀의 운명이 바뀌는 날이 찾아옵니다. 시시의 언니 헬레나의 혼사가 오가던 중이었습니다. 신랑감은 사촌 사이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요제프 1세. 과거 제국의 영광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황실은 황실이었지요. 가족 전부가 오스트리아로 직접 찾아갑니다. 약혼 일정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운명의 장난이 시작됩니다. 황태자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나의 동생인 시시에게 빠져들게 됐기 때문입니다. 키 크고 아름다운 16세 소녀가 황태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지요. 그는 이번 약혼을 주선한 어머니 소피에게 말합니다. “저는 헬레나의 동생 시시와 결혼하겠습니다.”

“약혼식에서 신부 동생과 사랑에 빠지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젊은 프란츠 요제프와 어린 시시.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비의 자리가 순식간에 바뀌게 된 것이었지요. 1854년 두 사람이 결혼합니다. 시시의 나이 고작 17살이었습니다.
황실의 부적응자 ‘시시’
“황궁에서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황실과 시시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이지 못했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시시가 황실의 엄숙주의를 견디지 못했던 탓이었지요. 격식을 크게 중시했던 황실 가문 합스부르크와 17세의 발랄한 소녀는 결코 조화할 수 없었습니다. 황실은 언제나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었습니다.

쇤브룬 궁전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시시에게는 누구보다 끔찍한 장소였다. [사진출처=Simon Matzinger]
더구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분위기는 계속 가라앉은 상황이었습니다. 1804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배 이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본국 오스트리아는 ‘제국’이라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지요.

시시가 시집을 간 1854년에는 제국의 가장 유력한 세력인 헝가리마저 ‘독립’을 부르짖고 있는 시기. 제국은 해체의 위기 속에서 자주 흔들렸지요. 황실 분위기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던 배경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일으킨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년)로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됐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다.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아이와 격리된 시시...우울증은 깊어지고...
“황실의 법도에선 황후가 아이를 직접 양육하지 않습니다.”

시시의 우울은 짙어집니다. 아이를 낳았지만 자주 볼 수 없어서였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출산’마저 ‘공적인 영역’이어야 했습니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행복마저도 박탈당해야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데려가려고요?” 시시와 두 딸.
그녀가 살던 바이마르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던 일이었지요. 우울함이 극에 달한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서 한 팸플릿을 발견합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저 외국인일 뿐이야.” 딸만 연거푸 낳은 그녀를 조롱하는 문구였습니다.

시어머니 소피로부터 온 걸로 추정되는 메시지였습니다. 황실의 권위자이자 어른인 소피는 그저 자유만을 추구하는 시시를 무척이나 마음에 안들어 했었지요. 불안증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그녀는 점점 야위어만 갔습니다.

“참으로 경박한 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왔구나. ”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 소피 대공비. 그녀는 시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헝가리와 사랑에 빠진 시시...그러나
그녀가 마침내 숨 쉴 공간을 찾았습니다. 남편이 그녀를 위로하고자 찾은 지역, ‘헝가리’였습니다. 정치적 암약이 횡행하는 궁정을 벗어나, 그저 순수하게 민족적 자긍심을 키워가는 헝가리인에게 그녀는 큰 감동을 하였지요. 합스부르크 가문에 눌려 고통받고 있는 ‘동병상련’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영혼의 동정심이 이 땅(헝가리)의 사람들에게 손을 뻗었다.”

이 여행을 마친 뒤부터 그녀는 헝가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날 때부터 자유주의자인 그녀는 제국의 이름으로 헝가리를 억압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사람들도 딱딱한 오스트리아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그녀에게 빠져들었지요.

“전 이곳에서 제일 행복해요.” 헝가리 괴돌레 성에서의 한 때. 이곳이 시시가 가장 행복함을 느끼던 곳이었다.
헝가리 여행의 끝에 불행이 시시를 덮쳤습니다. 첫째 딸의 죽음이었습니다. 고작 3살에 불과한 나이.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듭니다. 천사 같은 아이의 미소를 잊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임무를 잊어버릴 정도였지요.

남편 프란츠 요제프가 정서적인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그들이 이듬해 아이를 하나 더 낳을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지만 행복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 얼른 헝가리로 돌아가자.”
시어머니 소피는 다시 시시가 어머니로서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황실의 자손은 황실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시시는 좌절합니다. 발열을 동반한 심각한 건강문제를 겪게됐지요. 시시가 요양을 이유로 장기간 빈을 떠나 궁으로 돌아오지 않은 배경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생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또 다른 파트너입니다.”

시시가 다시 오스트리아 정계에 소환된 건 1867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제국의 파트너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였습니다. 헝가리의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지면서 황실이 이들에게 유화책을 건넨 것이었습니다.

“헝가리를 달래지 않으면, 우리 제국이 위험할 것이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헝가리 없는 오스트리아는 ‘제국’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점유하던 이탈리아도 통일전쟁을 일으키며 오스트리아에 반기를 든 상황. 헝가리마저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황실이 헝가리의 국가적 지위를 ‘속국’에서 ‘제국의 동반자’로 격상한 배경입니다.

제국의 명칭도 바꿨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제국의 가장 중요한 일원임을 공식화한 셈이었습니다. 헝가리인들도 엘리자베스 황후를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이같은 제안을 공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헝가리의 왕과 왕비이기도 합니다.” 프란츠 요제프와 황후 시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범을 기념해 헝가리의 왕과 왕비로 즉위하고 있는 장면.
엘리자베스는 헝가리의 유력 정치인이자 평소 존경하는 친구였던 안드라시를 총리로 강력히 추천합니다. 프란츠 요제프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지요. 그 역시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시의 헝가리 사랑이 부른 가정의 불화
“저는 괴돌레 성이 좋아요.”

헝가리의 승격은 부부 사이에 또 다른 파국을 불렀습니다. 시시가 마음의 안식을 헝가리에서만 찾았기 때문입니다. 무늬만 부부지, 사실상 별거 생활에 돌입한 것과 다름없었지요. 프란츠 요제프는 열정적으로 시시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빈으로 불러올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빈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배우 슈라트. 시시는 남편 프란츠 요제프에게 그녀와 교제를 권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오랜 기간 교제했다.
그녀는 그럼에도 남편이 외롭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여성을 만나 행복하게 연애 생활을 즐기기를 권유하기도 했었지요. 카타리나 슈라트라는 여성과 프란츠 요제프가 불륜에 빠진 배경이었습니다.

그 여배우는 ‘왕관없는 오스트리아 황후’라고 불립니다. 시시는 이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본인이 프란츠 요제프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녀는 이제 여행을 다니고, 지식을 쌓으며,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슈라트. 1910년경. 둘의 사랑은 거의 죽을 때까지 지속됐다.
시시에게 찾아온 또 다른 불행
“아드님이 자살했습니다.”

충격적인 비보가 시시에게 찾아옵니다. 유일한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루돌프가 내연녀와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부남인 루돌프가 18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와 비관 자살이라니.

제국 왕세자 루돌프는 유부남이었지만 젊은 처녀와 사랑에 빠진 뒤 삶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로 삶을 마쳤다.
시시의 삶은 또 한번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전후해 부모들도 잇단 세상을 떠납니다. 시시의 삶은 더욱 공허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녀는 이후 평생을 상복과 같은 검은색 드레스만 입고 다녔습니다.

시시는 모든 고통은 빈에 있다는 듯이, 유럽 전역을 유랑하고 다녔습니다. 수많은 정치인, 군인, 철학자를 만나 그들의 고견을 들으며 지적 유희를 채워야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꿈꾸던 삶이었습니다. 신문은 미의 여신인 오스트리아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합니다.

시시는 아들이 자살한 이후 급격한 우울증을 겪었다. 1899년의 초상화.
민족주의의 파고가 시시를 덮치다
“누군가 내 배를 찔렀어...”

불화의 시대는 그러나 그녀를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제국은 민족국가 성립을 막는 원흉으로 주목받습니다. 제국의 황후는 그 정점에 선 원수 중 원수였지요.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의 칼에 찔린 시시.
1898년 가을, 스위스 제네바를 여행했을 때였습니다. 시시의 곁에 웬 사내가 어슬렁거리다가 그녀의 몸을 훅 찌르고 도망갑니다. 그녀의 심장을 칼날이 꿰뚫습니다. 범인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 시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황망한 죽음이었습니다.
빈에 시시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행렬.
그녀의 시신이 비엔나로 운구됩니다. 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소리 높여 요구합니다. “헝가리 여왕도 함께 새겨달라”는 요구였습니다.

헝가리인들에게 그녀는 ‘국모’나 다름없던 셈입니다. 지금도 헝가리 곳곳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 마을로 가득합니다. 평소 자선 사업에 관심이 많던 황후의 인간적인 면모에 매료된 것이었겠지요.

시시 여왕이 자주 머문 스위스 테리테 지역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녀의 인기를 증명하는 작품. [사진출처=Traumrune]
사전에 남긴 유언장에는 그녀의 재산 상당 부분이 자선단체에 기부되도록 명시해 놨습니다. 그녀가 죽은 지 이미 1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이겠지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왔던 그 성품을 시민들은 여전히 추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희귀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모차르트만큼이나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시시의 이야기였습니다.

세계가 사랑한 여인 ‘시시’.
P.S.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들이 자살한 후 또 다른 후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삼았지요.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페르디난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전쟁을 선포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시시가 죽은 후,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불행이 덮친 것이었습니다.

<네줄요약>

ㅇ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로 통하는 ‘시시’는 언니의 소개팅남이었던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했다.

ㅇ발랄하고 자유로운 시시는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남편에게 ‘불륜’을 권한다.

ㅇ그녀는 헝가리 민중의 삶에 동감하면서 헝가리가 제국의 파트너로 격상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ㅇ20세기 초 민족주의 발흥으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살해당한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운 성품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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