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일류 선박이 태어나는 멋진 신세계 ‘스마트조선소’ [이동주의 신해양시대-9]
현재 상황에서 미래 변수까지
수십만 개 요소들 동시관리
K-조선 경쟁력 키워낸 밑거름
원 길이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 원주율 π(파이) 값을 구하기 위해 수학자들은 오랜 세월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았다. 원둘레와 지름 간의 비율이 3보다 크고 4보다 작다는 사실은 B.C. 3세기 아르키메데스를 비롯한 고대 수학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정밀한 값을 구하기란 여간 골 아픈 일이 아니었다. 만약 아르키메데스가 참신한 해법을 찾아냈더라면 두 번째 유레카 소동과 함께 나체쇼 상습범으로 붙잡혀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 3.141592…로 무한히 나가는 π 값을 구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은 유클리드 기하학이었다. 원에 접하는 정다각형 구조를 6각형에서 12각형, 24각형, 48각형으로 계속 늘리면 더 정밀한 근사치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수학자들은 다각형의 변을 쪼개고 또 쪼갰다. 16세기 말 프랑스의 프랑수아 비에트가 39만 3216각형 둘레를 구했고 17세기 네덜란드의 루돌프 판 쾰른은 무려 400경이 넘는 정다각형을 이용해 π 값을 소수 35자리까지 계산해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수학이라기보다 거의 육체노동이었다. 그 고단한 노동을 해방해준 인물은 23세 영국 청년 아이작 뉴턴이었다. 기하학 대신 함수를 활용한 무한급수 공식이 그의 비법이었다. 전 세계 수학자들이 평생 몸 바친 작업을 단시간에 뚝딱 해치우는 뉴턴의 마술은 많은 사람을 좌절시킨 동시에 훨씬 더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창의적 생각이 세상을 바꿔놓는 건 늘 순식간이다. 움직이는 물건 가운데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선박의 역사도 인류문명만큼 길지만, 그 대부분 시간은 π 값 구하기처럼 수작업에 의존해왔다. 조선소는 전통적으로 엄마의 자궁에 비유되는데 선박 건조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만큼이나 큰 인내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배가 첫 항해를 시작하는 진수식 때 갓난아기의 탯줄처럼 밧줄을 끊는 의식을 치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오늘날 K-조선의 경쟁력을 키워낸 ‘배들의 고향’은 거제 옥포만의 한화오션 조선소다. 선박 추세가 대형화, 첨단화할수록 난이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부품, 협력사, 장비, 자재에서 고객관리에 이르기까지 야드에서 벌어지는 수십만~수백만 개 요소를 동시에 다루는 업무의 복잡성은 인간 한계치에 도달한 지 오래다. 더 정밀한 π 값을 위해 다각형의 변을 끝없이 쪼개야 했던 수학자들의 고충과 비슷하다.
그 난제를 풀어낸 뉴턴의 방정식이 바로 ‘스마트조선소’다. 말 그대로 총명하고 혁신적인 시스템이다. 옥포 스마트조선소에선 지금도 초대형, 고부가가치, 친환경, 자율운항 등의 수식어가 붙은 초일류 선박들이 태어나고 있다. 신해양시대의 원동력이 생성되는 멋진 신세계다.
스마트조선소 중에서도 공항관제탑처럼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곳은 디지털 생산센터다. 야드에서 블록 단위로 진행되는 공정 현황과 위치가 대형스크린에 1분마다 업데이트되어 나타난다. 실시간 상황 파악과 신속한 지시가 가능하다. 현재 상황 외에 향후 기상변화 같은 미래요인에 대한 예측과 시뮬레이션도 당연히 포함된다. 특히 언제 빚어질지 모를 안전사고 예방책 수립은 모든 변수에 우선하는 상수다.
사물인터넷(IoT), 드론, 디지털트윈,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로 무장한 디지털 생산센터는 생산 현장을 넘어 해상 시운전까지 원격 관리한다. 시험 운전에서 드러나는 장비 성능, 연료 소모량 등 운항 정보를 파악하고 필요시 기술지원을 할 뿐 아니라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개선 방향까지 제시한다. 승선 인원이 제한되는 해상 시운전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헬기를 타고 날아가 해결하던 과거 방식과 확연히 비교된다.
스마트조선소를 구성하는 명물들은 이외에도 다양하다. 현실 공간과 같이 360도 가상현실(VR)을 구현하는 교육시스템은 특히 돋보인다. 선원들에게 장비 운전을 위한 사전교육을 하거나 도장(페인팅) 작업자들에게 스프레이 훈련을 하는 기능도 가상공간에서 이뤄진다. 조선업의 상징인 용접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AI 기반의 용접 로봇들이 투입되면서 상황에 따라 혼자 용접업무를 수행하기도 하고 사람과 함께 협업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스마트조선소는 인간의 단순 노동력을 대체했던 1차 산업혁명 당시의 기계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련한 현장 관리자의 지휘가 필요했던 생산 프로세스를 최적화해내고 장인의 솜씨처럼 섬세한 작업을 구현해내는 일을 재래식 자동화와 비교하긴 어렵다. 그만큼 스마트조선소 시스템 내부에는 선배들의 오랜 경륜, 노하우, 창의적 발상들이 곳곳에 녹아있다.
훗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반열에까지 오른 물리학자 뉴턴은 언어 구사력에도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제가 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조선소 역시 더 좋은 배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거인들의 헌신 위에 꽃피운 뉴턴의 공식이다. 그 거인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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