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 곱씹으며 아차산행… 한강 굽어보며 역사를 생각하다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햇살 찬란한 5월의 걷기 묵상은 서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사잇길로 올라가면 정문 옆 물고기 모양의 분수대가 학생들을 반기는 장로회신학대가 나온다. 한경직기념예배당을 지나 기숙사 건물 1층의 북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진열된 책을 살핀다. 국내외 주요 저자의 신학 서적을 아름답게 배치한 이 서점에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의 ‘저녁 기도’를 골랐다. 걷기 묵상은 곧 걷는 기도이다. 독일 사민당 정치인이기도 했던 영성가 블룸하르트 목사의 기도문을 곱씹으면서 장신대 후문을 통해 곧바로 아차산 등산을 시작한다.
아차산엔 무장애숲길이 설치돼 오르는 길이 더 편안해졌다. 30여분 올랐을 뿐인데 능선이 나오고 발아래 한강 조망이 나타난다. 아차산 보루에서 바라보는 강 풍경은 명품 중 명품이다. 보루는 적의 침입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산마루에 세운 작은 규모의 요새를 말한다. 한강 유역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팽팽히 대립했던 5세기 당시 고구려 장수왕은 여기서 출발해 강을 건너 백제의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공략했을 것이고 백제의 개로왕은 성이 함락될 때 도망가다 붙잡혀 이 아차산 요새로 끌려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이후 백제는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급하게 옮겨 역사를 이어간다. 한강을 바라보며 잠시 나라의 흥망성쇠를 생각해 본다.
아차산 용마산 일대 보루들을 연결한 길이 계속된다. 중간에 가파른 계단이 연속해 나오는 만큼 등산지팡이를 갖춰 무릎 발목 등 관절을 보호하는 것이 좋다. 이 길은 걷기 여행의 성지로 불리는 서울 둘레길 5코스와 일치한다. 서울의 동쪽 관문을 종주하는 이 길을 포함해 서울 둘레길 전체 코스는 156.5㎞에 이른다. 2022년 말까지 6만명 넘는 시민들이 완주했다.
망우산에 접어들면 서울 둘레길 4코스가 시작된다. 길은 더 순해지고 평탄해진다. 녹음 짙은 나무 터널 아래로 시멘트 포장된 길을 편안하게 걷다 보면 문득 오래된 무덤들이 나무 사이로 눈에 띈다. 과거 이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망우리 공동묘지였으나 지금은 폐장되고 숲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망우(忘憂)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묫자리를 동구릉 일대에 잡고 돌아오는 길에 이 산에 올라 ‘이제 나는 근심을 잊게 됐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그래서 망우리 공동묘지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의해 1933년부터 묘지로 조성됐고 40년간 운영됐다가 1973년부터는 매장이 중단됐다.
주민들은 이곳을 아름다운 숲으로, 또 역사문화공원으로 가꾸고 있다. 재불화가 고암 이응로 화백을 비롯한 프랑스 유명 인사들이 묻힌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처럼 문화와 예술과 역사를 대표하는 인사들을 기억하는 공간이 되길 소망한다. 산등성에 조성된 편안한 산책길을 걸으며 옛 이태원묘지 무연고 인사들과 함께 합장된 유관순,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설산 장덕수와 난석 박은혜 부부, 죽산 조봉암,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호암 문일평, 위창 오세창, 그리고 종두법을 개발한 송촌 지석영 선생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자와 이름이 비슷한 유상규(1897~1936) 의사의 묘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가묘가 눈에 띄었다. 유 의사는 경성의전 재학 중 3·1운동을 주도해 체포를 피하려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고 거기서 도산의 수행비서를 지냈다. 도산의 권고로 경성의전으로 돌아와 졸업 후엔 외과의사로 일하다 환자에게 병이 감염돼 나이 마흔에 사망했다. 도산은 유 의사의 죽음 2년 뒤에 세상을 떠나며 유 의사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도산의 묘가 옮겨 갔고 이곳엔 가묘만 남았다. 춘원 이광수와 소전 손재형이 쓴 도산의 비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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