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4000명 살해당했다…육두구 열매의 저주, 반다 학살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3>]
역사 속의 관념을 현대인이 정확하게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라 하면 사람들은 마피아 두목 같은 모습을 쉽게 떠올린다. ‘제왕’의 원래 모습이 오늘날 세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관념에 비해 물건에 대한 생각은 잘 변하지 않는다. 선사시대의 도끼는 돌로 만든 것이라도 도끼로 알아볼 수 있고, 그릇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것이라도 그릇에 틀림없다.
그런데 향료(spice)는? 향료는 물건인데도 고대 사람들, 중세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어떤 물건을 향료라고 부른 것인지 현대의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분분하다. 물건이면서도 관념과 깊이 뒤얽힌 존재였기 때문이다.
향료의 수요가 음식물의 부패를 막거나 감추기 위한 데 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잭 터너의 〈향료: 어떤 유혹의 역사 Spice: The History of a Temptation〉(2004)나 폴 프리드먼의 〈동쪽으로부터: 향료와 중세인의 상상력 Out of the East: Spices and the Medieval Imagination〉(2008) 같은 요즘 책을 보면 그런 통설은 극복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행에 작용한 향료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꾸밈’에서 ‘본질’로 옮겨온 요리법의 변화
터너는 음식물 부패와 관련된 향료의 기능을 가성비의 관점에서 일축한다. 그 비싼 향료를 쓰기보다 버릴 것 버리고 신선한 재료를 새로 구하는 편이 비용도 적게 들고 식사도 더 즐거웠을 것이라고.
향료의 특성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맛과 냄새에 있다. 맛과 냄새 같은 감각이 지금 사람들보다 옛날 사람들에게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계량적 세계관에 익숙한 현대인은 시각 외의 감각들이 많이 퇴화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삶에 필요한 물질에 끌리게 되어 있어서 그런 것을 식량으로 삼는다. 그런데 특별히 강하게 끌리는 물질에 마주치면 단순한 식량을 넘어서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물질은 음식으로만이 아니라 약품으로 쓰이기도 하고 종교의식에 사용되기도 한다.
프리드먼은 중세기 유럽의 요리법이 본질(authenticity)보다 꾸밈(artifice)에 치중했다고 본다. 재료 자체보다 요리의 기교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음식을 단순한 음식으로가 아니라 의료와 종교의 의미를 겹쳐서 보는 경향이었다.
근세로 접어들면서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요리법을 본질 쪽으로 돌려놓았다. 하나는 종교개혁이다. 중세 말기에 많은 성직자가 최고의 향락을 누리는 계층이 되었고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개혁의 표적이 되었다. 많은 개혁가들이 검소한 식생활을 강조했다.
또 하나는 민족주의의 성장이다. 향료의 요리법 지배는 문화적 보편주의(ecumenicalism)의 한 표현이었다. 획일적 표준에서 벗어나 각지의 특성을 내세우는 향토주의(provincialism)가 차츰 당당한 태도로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요리에서 기교보다 재료가 중시되었다.
15세기를 전후해 유럽의 향료 수요가 커진 것은 일시적 현상이었다. 새로 자라나는 부르주아 계층이 귀족계급의 소비 성향을 모방하면서 시장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머잖아 귀족계급과 다른 자기네 소비 성향을 키우면서 향료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점’이 필요로 했던 ‘학살’
대항해시대에 “향료 중의 향료”로 주목받은 몇 가지 향료가 있다. 정향(丁香, clove), 육두구(肉荳蔲, nutmeg)와 메이스(mace, 육두구 열매 속껍질) 등이다. 이 향료들은 인도네시아 동부의 몇 개 작은 화산섬에서만 산출되었기 때문에 그 섬들을 향료제도(Spice Islands)라 불렀다. 이 향료들은 많은 주목을 받은 만큼 기구한 운명을 겼었다.
아미타브 고시의 〈육두구의 저주: 행성 위기의 우화집 The Nutmeg‘s Curse: Parables for a Planet in Crisis〉(2021)은 반다 학살(Banda Massacre, 1621)의 의미를 살핀 책이다. 4백 년 전의 사건을 소재로 삼았지만 근대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시각을 깔아놓고 향료의 역사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준다.
1511년에 말라카를 탈취한 포르투갈인은 바로 향료제도로 탐사대를 보내 이듬해 봄 반다제도에 도착했다. 뒤이어 요새를 건설하려 했으나 현지민의 저항이 거세자 포기했다. 당시 반다제도 주민은 향료 교역에 전문화된 집단이었다. 자기네가 채취하는 육두구와 메이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정향까지 모아 외부로 수출하고 식량 등 생필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향료의 원산지 생산 구조를 그대로 두고 도매상 노릇에 만족한 셈이다. 17세기 들어 이곳에 진출한 네덜란드인은 그와 달리 생산과 유통의 철저한 독점을 바라보고 현지민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려 했다. 그 결과가 반다 학살이었다.
토벌 과정에는 이런저런 곡절이 있었으나 그 직전에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의 현지총독 얀 코엔(1587-1629)이 본사에 보낸 편지(1620년 12월 26일자)의 한 대목에 토벌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다를 확실하게 굴복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데려다 살게 해야 합니다.” 2천여 명의 병력에 더해 80인의 일본인 칼잡이까지 동원한 사실을 보더라도 코엔의 목적은 분명했다.
약 1만5천 명 인구 중 90% 이상이 죽거나 달아나고 1천 명 전후가 남은 것으로 확인된다. 남은 사람들은 외지에서 들여온 노예들과 함께 노예로 사역당했고 60년 후에는 100명 가량의 후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맨해튼과 맞바꾼 오지의 작은 섬?
반다 학살의 몇 달 전 VOC는 반다제도의 한 조그만 섬에 있던 영국동인도회사(EIC) 세력을 몰아냈다. 두 척의 배를 몰고 1616년 12월 룬(Run)섬에 상륙한 너새니얼 콘소프(1585-1620) 등 영국인 40명이 현지민과 협력해 네덜란드인에 저항하다가 1620년 10월 콘소프의 죽음 후 항복한 것이다.
2평방킬로미터도 안 되고 식수원도 없는 작은 섬에서 4년간 버텼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네덜란드인의 독점 정책에 분노한 현지민이 영국인의 개입을 반기며 그 섬을 넘어서는 지원체제를 구축했던 것 같다.
그런데 VOC의 룬섬 점령을 영국 측은 오랫동안 승인하지 않았다. 자국민이 점령하고 있던 섬을 부당하게 탈취당한 것이라는 입장을 영국은 견지했다. 그러다가 1654년 웨스트민스터조약으로 영국의 관할권이 인정되었다.
영국이 아직 관할권을 실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1667년 브레다조약으로 룬섬은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그런데 브레다조약 중에는 영국이 룬섬을 네덜란드에 넘겨주는 것과 함께 맨해튼섬(뉴암스테르담)을 넘겨받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룬섬과 맨해튼을 맞바꿨다는 인상을 사람들이 받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땅이 될 곳과 바꿨다면 그 시대에 향료가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었는지 알 만하다는 우스개도 나온다.
반다 학살은 17세기에 VOC가 향료시장 독점을 위해 자행한 수많은 만행의 하나다. ‘독점’이 자본주의의 지향점으로 세상을 구조적 모순에 몰아넣기 시작하는 현장을 고시는 보여준다. VOC가 일으킨 ‘향료전쟁’에 거의 생리적인 반감을 일으킨 현지민의 모습을 ‘독점’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과 대비하면서.
‘향료’의 신비로움을 벗어난 후추와 설탕
정향이나 육두구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교역의 역사에서 꾸준한 역할을 맡은 향료가 후추였다. 기원전 1213년으로 추정되는 람세스 2세의 미라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교역이 행해진 사실을 알 수 있고, 향료 교역에서 “검은 황금”이라 불리며 화폐 노릇을 하기도 했다.
플리니가 〈자연사〉에 후추를 언급한 데서 1세기 당시 로마에서 후추의 유행을 알아볼 수 있다. “후추 사용의 인기는 놀라운 일이다. ... 후추의 특성은 쏘는 맛 하나뿐이다. 이런 것을 멀리 인도에서부터 가져오는 이유가 뭘까!”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호초(胡椒)’란 약품명이 나타나지만 정확히 ‘후추’를 가리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킨사이)에 매일 몇 톤 분량의 후추가 들어온다고 적었다. 인도의 서남해안 말라바르 지역에서 재배되던 후추가 10세기경부터 수마트라를 거쳐 동남아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중국의 수요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향료”라 하면 사치품을 떠올리게 되는데 후추도 명나라 초에는 특수계층에서만 소비되는 사치품이었다. 15세기 초 정화 함대가 후추를 많이 가져왔고, 함대 해체 후 해금(海禁) 상황에서도 후추 수입은 계속 늘어나 17세기에는 일반가정의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유럽에서도 16세기 이후 후추의 사용이 계속 늘어났다.
사치품에서 생필품으로 후추보다도 더 극적인 변신을 한 ‘향료’가 설탕이다. 설탕은 인도에서 생산되기 시작해 중국과 유럽에도 알려져 있었으나 별로 중시되지 않고 있었다. 15세기 중엽 대서양의 마데이라와 카나리제도를 점령한 유럽인이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면서 생산과 소비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첫 항해 때 사탕수수를 가져가 심었다고 하는 데서 당시의 관심을 알아볼 수 있다. 그때 마데이라의 설탕 생산은 연 1400 톤이었다고 한다. (지금 전 세계 설탕 생산량은 2억 톤 가까이 된다.)
터너는 16-17세기 요리법에 많이 등장하던 설탕이 18세기에는 후식 외에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변화를 지적한다. ‘양념’의 자리에서 ‘식량’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후추와 설탕은 향료의 신비로움을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성격을 대변한 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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