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에이트 쇼' 정주행을 포기합니다
[윤일희 기자]
넷플릭스 드라마 < The 8 Show >를 보다 프리모 레비의 고백이 생각났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유대인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여러 책을 통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알렸다. 드라마를 보다 비인간적이면서 어쩌면 적나라하게 인간적인 어떤 일화가 떠올랐는데, 그가 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서술된 것이었다.
1944년 2월 이태리 유대인들은 만원인 열차에 실려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 중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추위, 배고픔, 갈증... 등이 떠오를 테고, 이 또한 큰 고통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이들을 미치게 한 건 배변이었다.
나치는 대부분 늙고 쇠약하고 아픈 유대인들을 열차에 가득 채워 장기간 이송시키면서 열차 내에 배변 도구를 일절 마련하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는 이 사건을 "문명사회에 있던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트라우마였고 인간의 존엄성에 가해진 깊은 상처였으며 불길한 징조로 가득한 추악한 공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짐승이 안 될 것이라는 노력"으로 겨우 배변 통을 마련하고 천으로 공간을 가려 수치를 견뎌야 했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에이트 쇼> 스틸 이미지 |
ⓒ Netflix |
넷플릭스 드라마 < The 8 Show >는 8명의 인물이 1층부터 8층까지 무작위로 선택한 공간에 갇혀, 시간이 쌓이는대로 돈을 벌 수 있는 쇼에 참가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게임 참가자들이 화장실이 없는 방 안에서 배변을 처리하는 장면을 보다 문득 유대인들의 열차가 생각났다. 배변이라는 인간의 기본 조건이 어떤 상황에서는 가장 비인간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연상 고리가 있었나 보다.
드라마 게임 참가자들은 1층부터 8층까지 한 건물에 머무는데 머무는 층이 곧 계급이다. 랜덤으로 정해진 계급은 바뀌지 않는다. 계급은 다양한 콘텐츠에서 인간의 조건을 다룰 때 활용하는 단골 소재다. 이 드라마는 층수로 인간을 분할해 통치하는 전략을 취한다. 어떻게든 인간을 구획해 놓으면 인간은 구획 지은 조건에 도전하는 대신, 내부에서 권력투쟁을 벌인다. 구획한 쪽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1층을 택한?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숙박 일수를 늘리는 일환으로 고안된 계단 오르내리기에서 1층인은 당연히 기여분이 없다. 눈치가 보인 그는 참가자들에게 배변 봉투를 내려받음으로써 자신의 장애가 끼치는 피해를 상쇄한다. 시청자는 그의 방에 넘쳐나는 배변 봉투의 악취를 전혀 느낄 수 없음에도, 이미 그 냄새에 압도 당한다. 1층인은 악취와 함께 자고 먹는다.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했다는 듯 최하층 계급에 장애인을 둔다. 계급의 위계는 1층이 가장 하위고 고층일수록 높아진다. 이는 유대인이 수용소행 수송 열차에 실리기 전 먼저 실려 간 사람들이 장애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장애 대부분이 후천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누구든 최저 계급이 될 수 있고 누구든 수용소행 열차에 실릴 수 있었지만, 이 사실은 망각된다. 마치 애초 장애인이 다른 종이기라도 한 것처럼 함부로 비하하고 적대시한다. 드라마에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은 계단을 적게 오르내리는 1층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방 선택이 우연이 아니라 신체적 상황이 개입된 것이라면 이는 전혀 랜덤이 아니지만, 불공정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참가자 모두는 선의든 악의든 존엄을 잠시 접어두고 돈을 택한 사람들이다. 이때 인간의 조건까지 포기해야 했음을 미리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이전에 받은 시급보다 수 배에서 수백 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참가자들은 존엄을 버리는 것에 주저함이 사라진다. 그래서 드라마는 돈이 계급이고 돈이 전부인 사회 속 비루한 인간 군상 중에 네 모습이 보이냐고 묻는 것일까?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에이트 쇼> 스틸 이미지 |
ⓒ Netflix |
요즘 무턱대고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려는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기력이 쇠해진다. 보는 게 고문인 수준이어서 대부분 정주행을 포기하게 된다. 고등학교 학교 폭력을 소재로 인간의 잔혹상을 다룬 듯한 TVING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도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드라마적 공간인 학교가 마치 수용소처럼 빗대어지고, 학교 안의 모든 구성원이 피라미드 계급에 굴종해 자율성이나 자기 의지를 상실한 수용소형 인격으로 그려진다. 인간의 잔인함보다 오히려 감정적 무능함을 그리는 드라마 캐릭터를 보며 시청자는 인간성 소멸의 종말적 현상을 목도하라고 강요받는다.
< The 8 Show > 역시 보통의 인간을 수용소 인격으로 만들 것임을 예고한다. 참가자 각자 금전 문제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합리적 판단을 멈추고 돈을 위해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임 속에 뛰어들었으니 짓밟히는 존엄은 각오하라는 것이다. 전 지구적으로 가장 물욕이 강한 나라 한국을 상정한 허구적 설정이라지만, 돈에 대한 성찰은 부재하고 상투적 다급함과 천박함만 가득하다.
맨 꼭대기 8층에 머무는 여성 참가자는 게임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된장녀'로 분해 시청자의 욕받이로 기능한다. 예를 들면 참가자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금을 개인의 화려한 옷을 사는 데 마음대로 유용하고, 8층에서 남들 보다 많이 벌어들인 돈으로 침대와 커다란 식탁, 욕조, 골프 연습장 등을 만드는 식이다. 누군가는 배변과 함께 먹고 자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로도 부족해 그는 특기가 섹스인 성인물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권력의 위력을 아는 악랄한 자본가가 된다. 참가자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되는 높은 시급을 받으며 음식을 통제할 권력을 틀어쥐고 참가자들을 농락하는 그가 여자인 것은 우연인가?
어떤 이유로 게임판에 들어섰든, 참가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판을 깐 구경꾼들인 고도 자본가의 흥을 돋우려 인간다움을 탈각한다. 장기판의 말인 신세를 자각하고 어떻게든 게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게임 참가자들의 탈인간화를 목격하며 시청자는 무의미한 서사에 사고를 멈춘다. 드라마는 그저 자극적이고 잔인하고 무가치한 사건의 연이은 전개 속으로 시청자를 몰아넣고 극심한 피로에 빠뜨린다. 3화를 끝으로 더는 볼 수 없는 피로와 권태감이다.
돈에 연루된 역겹고 극단적인 경험일지라도, 그 사건의 상황적 맥락이 일말의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면, 시청자는 인간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 OTT 서비스에 넘쳐나는 생존게임 드라마는 맥락적 고민도 없이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외치고만 있다. 인간적 공감대를 소거한 자극적인 생존 서사는 더 센 자극을 보는 즉시 휘발된다. 즉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장면들에서 시청자는 인간사의 무엇을 포착할 수 있을까?
< The 8 Show >를 비롯한 생존게임 드라마는 그 본령을 다하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 게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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