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도는 주택공급대책, 주민·지자체·건설사 ‘동상이몽’ [기자수첩]
“이번에도 재개발 안 되면 데모라도 하겠지.”
서울 서대문구 3호선 독립문역에서 330m,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현저동 주택가. 빈집촌으로 불리는 이곳의 분위기는 인왕산 현대아이파크 단지와 상가들로 정비된, 길 건너편과는 사뭇 다르다. 긴 계단이 이어지는 주택가 입구에는 ‘현저2 모아타운(소규모정비관리지역) 주민제안 전문가 사전자문 적정성검토 통과’라고 적힌 경축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현저동 1번지 일대는 서울시의 소규모 정비사업인 모아타운 신청을 추진 중이다.
23일 찾은 현저동 1번지 일대는 노후 불량 주택이 밀집해 주거 환경이 열악하고 편의시설이 부족해 보였다. 깨진 유리창, 온갖 잡동사니와 버려진 건축 자재들, 쓰레기 더미가 가득 차 있는 건물이 곳곳에 보였다. 군데군데 주민이 사는 건물에는 ‘거주자 외 출입 금지’ ‘보안 시스템 작동 중’이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한편에는 겨우내 주민들이 비축한 것으로 보이는 연탄들도 쌓여 있었다. 현저동에서 만난 한 주민은 “이번엔 재개발이 될까” 기대를 내비쳤다. “여기를 좀 둘러봐라. 누가 개발 안 됐으면 하겠나”라면서도 “또 모르지. 지금은 다들 (재개발을) 찬성하는 분위기지만 막상 추진되면 반대하는 사람이 나올지도….”라고 말끝을 흐렸다.
서울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노후 저층 주거지 정비사업이 한창이다. 현저동과 같이 정비가 필요한 빈집과 노후한 저층 주거지는 전국 곳곳에 많다. 중앙·지방정부는 정비사업 규제완화를 통해 주거안정, 도시재생을 이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비사업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지역마다 각각 이해관계자들의 서로 다른 생각이 정비사업의 브레이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모아타운과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 선정지, 선정 예정지 곳곳 취재 현장을 다니며 심각한 주민 갈등을 목격했다. 정비사업을 원하지 않는 반대 주민들은 “왜 멀쩡한 내 집을 건드느냐” “노후도 살아야 하는데 비싼 분담금을 어떻게 내느냐”고, 반면 찬성 주민과 투자자들은 “살아생전 이때 아니면 언제 새 아파트에 살아보겠느냐”며 부딪친다. 기자가 아닌 월급쟁이로 사회생할을 하는 한 시민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찬성 주민의 말도, 반대 주민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런 소규모 정비사업뿐만 아니라 일반 재개발 사업에서도 이러한 갈등이 쉽사리 해결되지 못한 이유기도 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 주택공급정책 성공을 위해 시가 지역 개발 계획을 독려하거나 조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찬반 양측에서 나온다. 기대와 달리 지자체는 사실상 한 발 뒤에 물러서 있다. 그럴 필요가 없는 탓이다. 시가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주민이 움직이지 않는 지역에는 갈등을 키우면서까지 투입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실제 지난 10일 서울시는 제4차 모아타운 대상지 선정위원회에서 공모 신청한 6곳 중 1곳만을 모아타운 대상지로 선정했다. 보류되거나 탈락한 5곳은 주민 반대가 많아 사업추진에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거나 지분 쪼개기를 이용한 투기가 이뤄진 곳으로 파악된 곳이다.
국토교통부의 전체적인 정비·도시재생사업 분위기도 비슷하다. 전날 국토부는 1기 신도시 중 재건축 규제 완화 혜택을 처음 받게 될 선도지구 선정 규모(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와 기준을 발표했다. 앞서 오래된 빌라촌을 소규모로 정비할 때 주차장, 운동시설 등 주민 편의시설 설치를 지원하는 ‘뉴빌리지’ 사업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역시 분담금 부담, 주민 찬반 문제 등에서 자유롭지 못해 비슷한 갈등은 반복될 수 있다.
중앙·지방정부가 정비·도시재생사업에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사업을 맡을 공급업체는 관심 밖이다. 건축비가 천정부지로 오른 현재 상황에서, 소규모로 정비사업을 추진하게 되면 그만큼 비용 부담이 커진다. 수요자에겐 기부채납(공공기여) 불만과 분담금 부담, 시공사에겐 수익성 악화로 돌아온다. 한 중견건설사 관계자는 “고금리 고물가에 원자재 가격까지 올라 공사비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여기에 아파트 분양시장까지 양극화가 심각하다. 모아타운 같은 소규모 사업장은 수익성이 낮아서 안 들어가는 게 낫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정비사업을 수주해서 뭐하겠나.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데 현재는 밑지는 장사인 상황이다”라며 “근본적인 중재 역할이 없다면 앞으로도 선별 수주는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22년 기준 전국 빈집은 약 145만채에 달한다. 이중 1년 이상 방치된 빈집은 13만2052채(9.8%) 정도다. 준공 후 20년 이상된 노후주택은 전국 1000만 가구를 넘어섰다. 폭우시 침수·재해 취약 주택도 여전히 많다. 한국기후변화학회 ‘서울시 반지하 가구를 고려한 홍수 취약성 평가’ 논문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전체 행정동 약 66%가 홍수에 취약한 상태다. 이를 보면 정비·도시재생사업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존재한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결국 주민과 투자자, 건설사, 정부·지자체 모두의 협조가 필요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주택공급 발표만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각 이해관계자이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모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택공급대책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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