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1만여명의 집단 상소… 정치 바꾸는 ‘공론’의 힘
이상호 지음
푸른역사, 260면, 1만6500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이 쓰는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가 심상치 않다. 2021년 조선시대 한 지방 고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수사, 재판, 처형 과정을 담아낸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첫 권으로 선보여 주목을 끌더니 이번에 1792년 만인소운동을 다룬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를 두 번째 책으로 내놓았다. 1권과 마찬가지로 조선사의 한 사건을 선택해 다큐멘터리처럼 재현하는데 흡인력이 대단하다. 인기 역사 시리즈물이 탄생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1권이 안음현 살인사건 처리 과정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사법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줬다면, 새로 나온 2권에선 영남 선비들이 주도한 만인소 상소 사건을 다루며 조선시대 특유의 상소문화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알려준다.
“1792년 음력 윤4월, 영남 남인으로 일컬어지는 경상도 유생들이 가족들의 눈물을 뒤로한 채, 목숨을 건 한양행에 나섰다.”
책은 영남의 선비들이 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해 이들이 상소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달 조금 못 되는 시간을 담아낸다. 저자는 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천휘록’에 만인소 상소 과정을 기록한 ‘임자소청일록’이 들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서술했다고 밝혔다. 이 기록을 남긴 인물은 당시 상소에 참여한 젊은 선비 류이좌로 추정된다. 저자는 류이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간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영남 선비 1만여명이 참여한 집단 상소 운동으로, 상소에 1만명 이상이 연명한 조선 최초의 사례였다. 표면적으로는 정조에게 불손한 상소를 올리고 경종을 왕으로 여기지 않는 행태를 보였던 류성한을 처벌하라는 상소였지만, 이면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고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던 기호 노론 세력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만인소운동은 100년 넘게 중앙정치에서 배제됐던 영남 사림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었고, 정조가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던 아버지 사도제자의 비극을 공식화하고 단죄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짧은 시간에 1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상소를 조직하고 이를 가로막는 갖가지 장애물들을 돌파해 나가는 영남 선비들의 모습, 어렵게 상소를 봉입한 선비들을 불러 직접 상소문을 읽게 하고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정조의 모습은 이 상소 운동이 품고 있었던 엄청난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또 사도세자 사건의 배후에 있었던 노론에 대한 단죄를 촉구하는 상소에 감동하면서도 곧바로 행동에 나설 수 없었던 정조가 영남 선비들의 거듭되는 상소에 부담을 느끼고 이들을 회유·압박하는 모습에서는 정치의 냉정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조선은 공론정치를 지향했고, 관료를 넘어 재야 유생들까지 상소를 올리는 문화가 있었다. 상소문화는 동아시아 전체에서 발견되지만 가장 두드러진 곳은 단연 조선이었다. 책을 보면 상소가 매우 중요하면서도 위험하고 고도로 정치적인 행위라는 걸 알 수 있다.
류성한은 잘못된 상소를 올린 일로 문제가 되며, 류성한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그야말로 곳곳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누군가 올린 류성한 관련 상소가 잘못됐으니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도 올라온다. 상소를 잘못 올려 죽임을 당하거나 세력 전체가 말살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어떤 상소는 개인은 물론 집단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1792년 만인소도 그런 경우였다.
책은 집단 상소가 발의되는 과정부터 서명, 작성, 제출되는 과정, 그리고 여기에 왕이 답하는 모습까지 상세하게 서술한다. 유림회의에서 집단 상소가 발의되면 대표단을 선출해 이들로 소청을 설치했다. 이어 소청을 이끌 우두머리인 소두를 뽑고, 전체 논의를 통해 상소문 문안, 제출 시기 등을 결정했다. 선비들의 상소 참여는 자필 서명이 원칙이었고, 상소문은 대표단이 한양으로 올라가서 직접 제출해야 했다. 모든 경비는 스스로 조달했고, 모든 과정은 기록으로 남겼다.
저자는 선비들의 집단 상소가 자발적 참여, 전체 협의, 엄격한 절차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론’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됐고, 정치를 바꾸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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