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의 쾌감' 지키면서 판 키웠다... 놀랄 수밖에 없는 '퓨리오사'
[김상목 기자]
▲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포스터 이미지 |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매드맥스'의 탄생과 완결, 그리고 21세기 완벽한 부활까지
<매드맥스> 3부작은 우리가 대중문화를 통해 접하고 상상하는 '세기말 아포칼립스', 즉 종말 이후 세계의 전형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감독 조지 밀러는 3부작을 통해 미국 서부 황야를 배경으로 한 무정한 서부극의 세계를 극단화시킨, 오직 생존이 지상과제인 비정하고 야만적인 지옥도를 펼쳐 보인다. 법과 윤리는 애초 사라진 지 오래고 오직 힘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말 그대로 '무법천지'에서 약육강식의 질서로 퇴화한 극소수 생존자들이 서로 죽이고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암울한 세상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하지만 3부작은 동일한 배경을 공유하되 여러 안과 밖 사정으로 인해 사뭇 다른 풍경을 펼쳐 보이긴 했다. 첫 번째 <매드맥스>는 종말이 진행되는 말 그대로 '세기말'의 풍경으로 치닫는다. 사회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던 정의로운 경찰관은 인륜을 상실한 무법자들에게 가족을 잃고 황무지의 질서로 복수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 복수의 끝에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속편이자 후대에 '매드맥스'의 대명사로 각인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매드맥스: 로드 워리어>는 오늘날 사막과 폐허를 무대로 한 종말 이후의 세계 이미지를 완성해버린 작업으로 '고전' 반열에 올랐다. 해당 작품 이후로 비슷한 설정의 대중문화 콘텐츠 가운데 <로드 워리어>의 영향을 온전히 벗어난 결과물이 얼마나 있을까?
고독한 무법자로서의 히어로, 얼치기 악당이지만 영화 속 풍경의 대세가 된 모히칸 머리의 무법자들, 윤리를 초월해 '괴물'이 된 빌런들, 황량한 폐허와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모래사막, 누더기를 걸친 생존자들의 세계가 <로드 워리어>에서 완결된 것이다. 세 번째 연작 <매드맥스: 썬더돔>은 이것저것 볼거리가 적지 않은 준작이지만, <로드 워리어>의 '순한맛' 재탕에 가까워 보였다. 시리즈의 유효수명이 다해가자 감독은 자신(과 '맥스' 역 멜 깁슨)에게 성공과 출세길을 열어준 시리즈를 과감하게 벗어난다. 피와 모래의 무정한 세계를 질주하던 감독은 이후 <꼬마돼지 베이브> 같은 작업에 눈을 돌리며 나이들어갔다. '맥스'를 맡았던 멜 깁슨 역시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만 갔다. 더 이상 <매드맥스> 시리즈는 부활할 것 같지 않았다. 아쉽지만 이미 '레전드' 반열에 오른 3부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전 반열에 오른 <매드맥스> 시리즈를 종종 추억하며 역시 그만한 작품이 이후로 없다는 푸념에 잠겼던 '클래식' 팬들에게 저 멀리서 뜬소문이 들려왔다. 70줄에 들어선 조지 밀러 감독이 <매드맥스> 시리즈의 새로운 속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대체 완벽한 마무리였던 3부작에 새로운 게 들어갈 틈이 있다는 말인가? 좋긴 한데 자칫하면 시리즈 명성에 먹칠하는 범작이 '어른의 사정' 때문에 양산되는 건 아닐까 희비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맥스'가 귀환했다. 그리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그해 최고의 액션영화로 손에 꼽히며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많은 이들은 어떻게 화석이 다 된 시리즈에 새로운 피가 돌고 멈춘 지 오래인 엔진이 씽씽 돌아가게 되었는지 경이로워했다. 수없이 많은 감독들이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초창기 명작에 억지로 인공호흡기를 붙였다가 오히려 망신을 당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들이 목격한 <분노의 도로>는 오리지널 시리즈의 질주와 21세기의 변화한 사회문화적 지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기적이자 클래식한 아드레날린의 폭주를 온전히 감당하는 결과물이었다. 새롭게 톰 하디가 담당한 21세기 버전의 '맥스'는 조력자로서 새로운 여성 히어로 '퓨리오사'의 모험을 돕는다. 그리고 퓨리오사가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마침내 목표를 완수하자 초연하게 사라져간다. 그리고 온전히 황무지는 퓨리오사에게 돌려진다.
▲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 이미지 |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21세기에 부활한 <매드맥스> 시리즈의 2번째 결과물은 <매드맥스: 퓨리오사 사가>다. '사가'라니, 이제 본격적으로 리부트의 주역이 퓨리오사로 바통 터치되었다는 것을 확인도장 찍는 셈이다. 과연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라는 강인하지만,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고스란히 지닌 존재가 어떻게 종말 이후 폭력만이 지배하고 숭앙받는 황무지에서 성장해 주역에 오르게 되었는지 서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전편 <분노의 도로>에서 이미 퓨리오사의 사연과 역량, 그리고 마침내 성공한 복수까지 관객은 소상히 확인했기 때문에 그런 주인공의 과거는 미주알 고주알 산만한 팬서비스로 그칠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백전노장 조지 밀러는 그런 안일함에 기우는 대신, 시리즈 전체의 근본적 강점을 고수하는 것을 1차적으로 견지한다. 그리고 남는 공간에는 감독이 21세기 리부트에서 20세기의 세기말적 비전과 대비되는 새로운 시대정신, 무정부적 파멸로 치닫는 폭력 대신에 비록 많은 부분을 양보하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 새로운 희망과 공동체의 재건을 기약하는 도전정신을 채워넣는다.
영화가 시작된다. 바다조차 말라붙은 불모의 사막 한 구석에 마치 섬처럼 자리한 녹색의 땅이 존재한다. 어린 소녀들은 재잘거리며 탐스러운 과일을 나무에서 따 먹으려 한다. 시리즈에서 보리라 기대할 수 없었던 생명과 활기가 넘치는 풍경이다. 하지만 곧 관객은 이곳이 아포칼립스의 세상이라는 걸 직시하게 된다. 바이커 갱단의 정찰대가 마침내 약속의 땅을 발견하고 살육을 벌인다. 어린 퓨리오사는 어설프게 저항하다 포로가 되고, 황무지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약속의 땅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지도로 갱단의 본거지로 끌려간다. 그곳에는 사막을 지배하는 폭력의 정수이자 무법자들 위에 군림하는 군주 '디멘터스'가 서 있다.
퓨리오사의 어머니는 딸을 구출하고 약속의 땅을 지키고자 잠입한다. 용맹히 활약해 목표를 이룰 것 같았지만 간발의 차로 디멘터스와의 일전에서 패배하고 만다.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만 도망갈 수 없었던 퓨리오사 역시 포로가 되고 만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뒤 타인과 소통을 거부하며 말문을 닫는다. 그런 퓨리오사를 디멘터스는 귀중한 전리품이자 살아있는 노리개처럼 애지중지한다. 약속의 땅을 찾기 위해 황야를 떠돌던 바이커 갱단은 우연히 또 다른 거대세력, 전작의 무대인 '시타델'과 그곳에 군림하는 '임모탄 조'의 세력과 대치한다. 만만하지 않은 두 세력은 항쟁을 거듭하다 휴전하고 세력균형을 이룬다. 그 협상 과정에서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의 차지가 된다.
퓨리오사는 원래대로라면 시타델의 지배자, 임모탄 조의 자손을 번식시킬 후보로 성노예가 되어야 했지만,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밑바닥으로부터 살아남기를 결심한다. 물론 여성이라는 걸 적당히 숨긴 채 그는 근육과 완력이 아니라 자신이 갈고 닦으면 더 잘할 수 있는 역량을 증명해 일정한 지위에 오른다. 탈출할 기회만 엿보는 그를 이해하고 도우려는 이도 생긴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계획은 결코 협력과 공존 따위는 지속 불가능한 야만적인 세력들 사이에 재개된 전쟁 속으로 휘말려든다. 하지만 대신에 퓨리오사는 오랫동안 숙원이던 복수의 기회를 잡는다.
▲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 이미지 |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시리즈물의 매력이라면 역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심지어 원래는 그저 즉흥적으로 구상되었던 장치들이 후대에 해석의 힘을 빌어 자가증식하듯 확립된 세계관과 설정을 확인하는 재미일 것이다. <스타워즈>가 그랬고 <매트릭스>가 그랬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말할 것도 없다. <매드맥스> 시리즈 역시 그런 반열에 오를 만한 확장 세계관을 자랑한다. 영화에서 만화와 게임 등으로 확산이 이뤄지면서 여러 부가설정이 덧붙여지다 보니 관객 중 상당수는 새로운 속편이 등장할 때마다 전작들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거나 설명이 부족했던 장치들에 개연성을 부여해줄 해설 장면에 환호하곤 한다. '장르' 매력이 워낙에 정평이 난 시리즈다 보니 <매드맥스> 리부트에서도 해당 부분은 치명적 매력을 뿜어내기에 이른다.
소소한 팬 서비스가 상당하다. 전편에서 사막 황무지의 '초강대국'이라 할, 어쩌면 인류에게 남은 최대 세력이라 해도 무방할 '시타델'의 보다 다양한 면모가 궁금해 왔던 이들을 위해 제공된다. 격렬한 전개를 위해 세부 사정을 보여주지 못했던 <분노의 도로> 속 시타델의 '일상(?!)' 풍경 가이드인 셈이다. 그리고 임모탄 조의 세력이 다른 황무지의 약탈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임을 확인하게 된다. 남아 있는 조금의 자원을 서로 뺏고 빼앗기는 약탈의 세상에서 오직 그의 세력만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경제를 수립하고 있음이 화면에 구체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식량과 물을 공급하는 '시타델'↔연료를 시추하고 정제하는 '가스 타운'↔구시대의 무기를 발굴하고 보급하는 '무기 농장'으로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필수적인 자원을 상호보완으로 유통하는 수요와 공급이 일체화되어 있다. 디멘터스의 세력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확인된다.
언뜻 스쳐 지나가듯 눈에 띄는 시타델의 풍경, 부품을 조립해 거대한 전투 트럭을 생산하고, 양배추와 감자를 사막 한복판에서 수확해 거래하는 장면은 아포칼립스의 불모지에선 경이로운 찰나가 아닐 수 없다. 일단 무엇인가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눈에 부실 정도다. 이 장소를 기반으로 한다면 어쩌면 미약하나마 문명사회가 복구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볼 법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시타델을 정점으로 한 체제는 폭력적인 '수컷'들이 지배하고 착취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히 자신의 기여를 인정받을 능력치와 기술이 있다면 중용받아 비교적 멀쩡하게 대접받을 수 있지만, 약자에겐 미래를 기약할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퓨리오사는 억압과 착취가 지배하지만 최소한의 예상과 대응은 가능한 시타델의 사회 내에서 여성으로서의 신체적 약점을 보완할 생존기술을 인정받은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주어진 체제 내에서 안위를 택했다면, 임모탄 조의 세력 내에서 <분노의 도로>에서 그가 처음 등장하던 순간처럼 상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퓨리오사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헤쳐나온 건 그런 출세주의와는 까마득히 달랐다. 그리고 그를 살아남게 해준 건 일차적으로는 어머니와 자신의 운명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디멘터스를 향한 복수귀로서의 면모였다.
하지만 퓨리오사가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거를 벗어나야만 한다. 해답은 '복수'의 완성과 그를 통한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이다. 영화는 그런 퓨리오사의 사정을 현란한 액션과 주인공의 성장을 통해 구현하려 한다. 그런 탄탄한 서사 앞에서 비록 소소한 재미를 듬뿍 선사하긴 하지만 시타델의 운영체제, 임모탄 조의 전사들인 기괴한 컬트집단 '워보이'들의 진면목, 전작에선 미쳐 눈요기할 기회가 없었던 사막의 무법자 집단 개개의 기상천외한 전투법 등은 부수적일 따름이다.
▲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 이미지 |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새로운 추가지점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사막을 휘감는 폭주의 쾌감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음이 관객을 놀라게 할 것이다. <로드 워리어>와 <분노의 도로>에서 전개를 책임진 불모의 황무지에서 교통신호건 앞뒤차량이건 전혀 신경쓸 것 없이 오직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즉 '8기통' 엔진을 한계까지 구동하는 속도감은 전혀 훼방 당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그저 거들 뿐이다.
하지만 무정부적 허무감 대신 21세기의 시대정신,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지향을 연료 첨가제처럼 추가한 리부트의 본격 개시인 <퓨리오사 사가>는 익숙한 야만과 폭력의 풍경에 무의식 중에 젖어들 수 있는 위기를 영리하게 돌파해가며 대안적 서사로 차분히 전진한다. 특히 영화를 보던 중 본격적으로 임모탄 조 vs. 디멘터스 세력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황무지 40일 전쟁'은 의도적으로 대략적으로만 그려진다. 아쉽다는 소리가 제법 나올 만하다. 전편에도 등장했던 임모탄 조 세력의 중요 간부 '식인종'이 마치 역사가처럼 고대로부터 인류가 벌였던 무익한 주요 전쟁을 거론하는 가운데 풍경처럼 그려지는 황무지 전쟁은 무차별 폭력의 쾌감 대신 타이어 하나 기름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약탈하는 '자원 전쟁'의 정점으로 묘사되는 데 그친다.
하지만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 vs. 이슬람 세력의 결전이던 하틴 전투가 극도의 절제미를 통해 폭력적 이미지의 분출 대신 차분하게 결과만 추출하던 것과 동일한 효과로 잔뜩 기대하다 실망했을 관객들 눈앞에 정리한 건 비용 절감이나 기술적 부담 문제 때문은 결단코 아니다. 전쟁영화에 열광하는 적지 않은 관객들이 실제 현실과 유리된 폭력미학을 향한 탐닉으로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감독은 결코 <퓨리오사 사가>에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런 기대에 편승할 생각이 없음을 단호히 증명하고자 한다. '디테일의 악마'에 홀리는 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폭주에서 궤도를 이탈하는 데 불과하다.
팬 서비스의 극치라 할 황무지 전쟁과 시타델의 지형도, '생체기술자'와 '역사가(히스토리맨)' 등 보조 캐릭터에 대한 설정 보충은 오랜 시간 기다려온 팬들에게 충분히 쾌감을 제공해 주지만 중반부 이후 급속하게 비중이 줄어든다. 이는 야만적 독재자들의 권력이 구현한 구체제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는 것을 적절하게 차단하고자 한 제작진의 결단으로 보인다. 그런 이미지의 향연이 재미나기는 하지만 빠져들면 안 된다는, '폭력 중독'에 대한 경계태세다. 중요한 건 극단적인 세상에서도 폭력에 그저 굴복하고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주제의식이라는 노장 감독의 충고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퓨리오사는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생사의 위기를 넘긴다. 물론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주인공이라 해서 신묘한 초능력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할 순 없는 노릇이다. 퓨리오사는 슈퍼히어로로 태어난 게 아니라 지옥의 바닥에서 자신의 연약한 팔다리로 필사적으로 올라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인공의 면모는 퓨리오사가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식을 스타일로 구현해가며 표출된다. 현란한 액션에 눈이 팔리던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야만적인 무뢰배의 폭력과 차별화된 퓨리오사의 전투 장면, 그리고 냉철한 이성과 합리주의 면모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생존 자체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간직한 채 미래를 위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을 발견하는 수순으로 이어질 테다. 그렇게 '사가 SAGA'라는 단어 어원에 걸맞은 (여성) 영웅의 탄생설화를 목격하고 마는 것이다.
<매드맥스: 퓨리오사 사가>는 전편에서 이타적인 여성연대를 위해 생명을 걸고 도전하던 퓨리오사의 사정을 구체화한다. 임모탄 조에게 신임을 받으며 '임페라토르' 칭호를 획득한, 지배자의 일족을 제외하면 시타델 사회에서 최정점에 오른 주인공이 왜 어렵게 쌓아 올린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려 했는지 온전히 밝혀지는 셈이다. 또한 그가 보여주는 능력과 의지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도 증명한다. 그저 특별 케이스로만 여겨졌던 전편에서의 퓨리오사가 비로소 SAGA의 주역으로 우뚝 서는 토대로서 <퓨리오사 사가>는 제 몫을 필요충분하게 소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매드맥스' 대신 '퓨리오사'가 개척할 황무지의 미래를 두근거리며 또다시 기다려야 할 뿐이다.
<작품 정보>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Furiosa: A Mad Max Saga 2024│미국, 오스트레일리아│액션 2024.05.22. 개봉│148분│15세 관람가 감독 조지 밀러 주연 안야 테일러 조이(퓨리오사 역), 크리스 헴스워스(디멘투스 역) 출연 러치 험(임모탄 조 역), 네이선 존스(릭투스 에렉투스 역), 앵거스 샘슨(생체기술자 역), 존 하워드(식인종 역), 찰리 프레이저(퓨리오사의 어머니 역), 고란 D.클루트(옥토보스 역), 데이비드 콜린스(스메그 역), 딜런 아도나스(발키리 아역), 알릴라 브라운(퓨리오사 아역)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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