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 저항한 최초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반전 매력'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시대의 뮤즈', '현대의 아프로디테'로 불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는,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으로까지 꼽히는 전설적인 슈퍼스타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미스터리한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먼로가 대중문화계에서 활약한 시간은 겨우 10여 년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명성과 영향력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먼로는 흔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화려한 미모의 여배우이자 '섹스심벌'의 이미지로만 기억되어 왔지만, 알고보면 그녀는 시대를 앞서나가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불합리한 관행과 차별에 가장 먼저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진취적인 여성'이기도 했다.
5월 2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2회에서는 '할리우드에 저항한 최초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편을 통하여 우리가 몰랐던 인간 먼로가 보여준 반전 매력을 조명했다. 송낙원 건국대 영화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끝에 만난 '은인'
먼로는 1926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났다.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모튼슨(Norma Jeane Mortenson)이었다.
먼로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먼로는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고,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먼로를 정상적으로 양육하는 게 불가능했다. 먼로는 생후 12일부터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해야 했으며 불과 9살 때는 위탁가정에서 첫 성폭행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어린 먼로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는 영화관이었다. 먼로는 하루종일 영화관에서 다양한 영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훗날 먼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연기는 감옥 안에서 '나가는 곳'이라고 적힌 문을 보는 것과 같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밝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게임같은 것이었다. 연기는 빛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었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1942년 16세의 먼로는 고아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 5살 연상의 이웃집 남성이었던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결혼 1년반 만에 태평양전쟁(2차세계대전)에 남편이 참전하면서 홀로 남겨진 먼로는 생계를 위하여 군수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1944년 18세의 먼로는 우연히 한 영상부대 소속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로 처음 데뷔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당시 작가는 다른 여성들과 달리 카메라를 피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미소와 포즈를 취하는 먼로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로 먼로는 공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모델의 길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잡지전성시대를 맞이하여 먼로는 핀업걸(Pin-up girl)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945년 모델 에이전시와 정식 계약하며 이듬해까지 33개 유명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만큼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편으로 먼로는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배우의 꿈을 잊지 않았다. 먼로는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시기에도 연기 강습만큼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먼로는 "1달러면 스타킹 하나와 샌드위치, 햄버거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스타킹과 햄버거는 날 배우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대사 강습은 나를 배우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술회했다.
1946년 7월, 먼로는 당시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메이저영화 스튜디오인 20세기 폭스 영화사에 오디션을 거쳐 6개월 단기계약을 맺으며 배우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소속사에서는 '마릴린 먼로'라는 활동명을 그녀에게 지어줬다. 먼로는 친모의 결혼 전 성이었고, 마릴린은 1920~1930년대 브로드웨이 여성 뮤지컬 스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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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먼로가 배우로서 자리잡는 길은 쉽지 않았다. 먼로는 당시 할리우드에 관행적으로 만연하던 여배우에 대한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 캐스팅 관리자가 배우에게 일자리나 기회를 대가로 성적 요구를 하는 권력형 성범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훗날 먼로는 자서전에서 "돈과 권력으로 자신을 매수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배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고백했지만, 당시로서는 여배우에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할리우드 업계에서 찍혀 퇴출 위기까지 몰렸던 먼로를 구해낸 것은, 조니 하이드라는 인물이었다. 할리우드의 거물 에이전트이자 신인발굴의 귀재로 꼽혔던 하이드는 먼로의 남다른 스타성을 간파하고 손을 내밀었다. 먼로는 하이드의 권유로 성형수술을 하면서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갖추게 됐다. 또한 하이드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먼로가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아끼지 않았다. 먼로는 1950년 거장 존 휴스턴 감독의 <아스팔트 정글>에서 주인공의 정부로 처음 비중있는 역할을 맡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하이드는 31살 연하의 먼로에게 연정을 품었지만, 먼로는 그의 프로포즈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이드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먼로가 폭스사와 7년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해놓으며 끝까지 먼로를 위한 순애보를 다했다. 훗날에도 먼로는 하이드를 "인생의 은인, 내 삶의 구원자"라고 정의하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위기를 정면 돌파한 먼로의 용기
먼로는 < Home town story >(1951), < Don't bother to knock >(1952) 등의 작품에서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관능미 넘치면서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캐릭터를 열연하여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라이징스타로 주목받게 된다. 26세의 먼로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헨리에타 어워드'를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특급신인으로 부상했다. 당시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먼로를 가리켜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여자"라고 칭하며 그녀의 매력을 극찬했다고 한다.
당시 할리우드는 배우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고 관리해주는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이 보편적이었다. 먼로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당시 남성들이 선호하는 섹시한 금발에 순종적인 모습으로 판타지를 자극하는 '빔보(Bimbo, 외모가 출중하지만 머리가 좋지 않은 여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 캐릭터의 전형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먼로는 무명 시절에 촬영한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지에서 촬영한 누드 사진이 뒤늦게 이슈가 되며 첫 위기를 맞이했다. 당초 소속사는 이미지 타격을 우려하여 먼로에게 합성된 가짜 사진이라고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먼로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생활고를 솔직하게 해명하며 누드 스캔들에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먼로의 누드 사진은 오히려 대박을 터뜨리며 전화위복이 되었다. 대중들은 생활고와 어두운 과거를 솔직히 인정한 먼로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먼로의 누드가 담긴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먼로의 인기에 힘입어 무려 5만 부가 판매되는 초대박을 터뜨렸고 이는 먼로의 스타성과 인지도를 높이는 전환점이 됐다.
먼로가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라잡게 된 계기는 '트렌드 세터'로서의 독보적인 매력이었다. 1953년 범죄스릴러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마침내 첫 영화 주연을 맡은 먼로는 연기력 뿐만 아니라 패션이나 하이힐 워킹(먼로 워크, Monroe walk) 등을 통하여 이른바 자신만의 '마릴린 먼로 스타일'을 유행시키며 뜨거운 인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미국 뮤지컬 코미디의 고전으로 꼽히는 1953년작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당시 27세의 먼로가 입고 나온 강렬한 '핫핑크 드레스'는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며 당대 여성들의 최고 패션아이템으로 등극했다. 먼로가 인터뷰에서 애용한다고 밝힌 사넬 향수와 파이퍼 하이직 샴페인 역시 '먼로 향수', '먼로 샴페인'으로 불릴만큼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처럼 여성들의 워너비 스타로 등극한 먼로를 가리켜 언론에서는 "역사상 영화계에 등장한 사람들 중에 마릴린 먼로만큼 여성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는 없었다"고 할 만큼 그녀의 남다른 영향력을 설명했다.
의외로 먼로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었다. 먼로는 1954년 1월, 12세 연상의 야구스타였던 조 디마지오와 재혼하고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우연히 그녀의 열혈팬이었던 크리스텐 베리 미군 장군을 만나 한국 위문 공연을 제안받았다. 먼로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고 한국을 방문하여 미군 부대에서 공연을 펼쳤다.
먼로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얇은 드레스 하나만 입고 공연을 소화했고, 장병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훗날 먼로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두고 "처음으로 스타가 된 기분을 느꼈다"고 회고하며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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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계적인 스타로 올라선 먼로는, 차츰 이전까지의 여배우와는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스튜디오가 만들어준 백치미 빔보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진정한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먼로는 자신을 둘러싼 할리우드의 불합리한 관행에 가장 먼저 저항한 여배우였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 제작시스템에서 여배우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 정도의 취급을 받아야 했다. 먼로는 영화사의 요구로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을 억지로 소화해야 했고, 부상에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무분별한 약물복용을 강요받기도 했다.
먼로는 이러한 부당하고 비정상적인 할라우드 관행에 맞서 자신이 출연할 작품의 대본을 먼저 보고 영화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할 것을 최초로 요구하여 관철시키는 데 성공한다. 1955년에 먼로는 인생작인 < 7년 만의 외출 >에 출연하여 다시한번 티켓파워를 인정받았다. 당시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부여잡는 장면은 지금도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그해 먼로는 LA에서 뉴욕으로 떠나 여배우 최초로 자신의 영화 제작사 MMP를 설립하여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거대 메이저 스튜디오의 간섭과 전횡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배역과 작품을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할리우드 영화계 퇴출까지 각오해야 했던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폭스사는 먼로의 독점계약을 주장하며 제작사 설립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먼로는 계약서에는 배우로서의 출연조건만 있을뿐 제작사 설립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양측의 법정 공방은 1년 가까이 이어졌고 두 번째 투쟁 역시 최종적으로 먼로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먼로는 폭스사 외에도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출연작를 연출할 영화감독에 대한 승인권, 본인의 제작사에서 영화를 제작할 자유 등을 인정받게 됐다.
먼로는 이제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아티스트 개인이 거대한 스튜디오에 맞서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뿐만 아니라, 그동안 감독과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던 배우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여배우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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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먼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빔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반전매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투철했던 먼로는 이미 스타가 된 이후에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연기력을 갖춰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뉴욕 최고의 연기학교였던 액터스 스튜디오를 다니면서 자기 개발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먼로는 연기 외에도 지적인 욕구가 매우 높았고, 독서광으로도 유명했다. 사후에 그녀의 애장품으로 무려 430여 권의 책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예술, 희곡, 시집, 정치 등 방대한 분야를 아우를 정도였다. 먼로는 평소에 음악이나 그림 역사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UCLA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을 수강할 만큼 스마트하고 학구열이 높은 여성이었다고 한다.
먼로는 독립 이후 자신이 제작한 첫 영화인 1957년작 <왕자와 무희>에서 감독이자 남자 주연배우로 거장 로렌스 올리비에를 낙점했다. 여기서 먼로는 감독의 디렉션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해석으로 연기를 이어갔는데, 이는 여배우가 수동적으로 감독의 지시만 따라야 했던 영화계의 관행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또박또박 할말을 다하는 젊은 여배우에게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자서전에서는 "먼로는 현명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배우였다. 그녀는 뛰어난 통찰력과 캐릭터 분석력을 갖춘 훌륭한 배우였다"고 극찬하며 먼로를 배우로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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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먼로의 거침없는 행보는 배우로서의 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먼로는 당시 보수적인 할리우드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먼로는 할리우드의 오랜 관행이었던 캐스팅 카우치를 가장 먼저 폭로하며 비판하는가 하면, 흑인 인권과 반핵운동, 여성인권 등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인종차별문제로 먼로에게 도움을 받았던 흑인 여성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는 훗날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본인은 몰랐지만 시대를 앞서갔다"며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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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의 스캔들도 유명했다. 먼로는 케네디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부터 정치적 지지자로 처음 관계를 맺었고, 두 사람의 불륜 의혹은 밀러와의 이혼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962년 5월 19일 케네디의 생일파티에서 먼로가 과감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여 끈적한 목소리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의미심장한 장면은 엄청난 화제가 됐다. 이는 케네디와 먼로의 미묘한 관계를 세간에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순간이 됐다.
한 일화에서는 먼로의 노골적인 과감함에 부담을 느낀 케네디 대통령이 생일파티 다음주에 먼로와의 관계를 바로 끝내버렸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또한 동생 로버트는 먼로에게 형 케네디의 이별통보를 전하러 왔다가 먼로와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케네디 형제와의 스캔들과 복잡한 남성편력으로 그녀는 여배우로서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와 평판이 훼손하는 대가 또한 감수해야 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유명인들과의 연애는 먼로가 '미국 정부의 감시대상'이 되는 뜻밖의 결과까지 초래했다. 1950~1960년대 당시 미국은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먼로의 남자들이었던 밀러는 한때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아야 했고, 심지어 케네디 형제는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다. 여기에 반핵운동 등 사회 현안에 줄곧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온 먼로의 전력과도 맞물려, FBI와 CIA 등 미국 주요 정부기관들은 오랫동안 먼로를 국가 보안에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도청까지 해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줬다.
1962년 8월 4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뜻밖의 사실이 전해진다. 당대의 톱스타였던 마릴린 먼로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경찰 조사와 부검결과 먼로의 죽음은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로 밝혀졌다.
하지만 먼로의 의문스러운 최후는 많은 추측과 소문을 낳았다. 먼로의 지인들은 먼로가 사망 전날까지도 건강했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먼로의 부검자료 원본이 갑자기 도난 당했다는 사실도 의문을 자아냈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먼로의 죽음을 두고 조직적 은폐 및 타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먼로 사망의 배후설로 의심된 이들로는 정부기관도 있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연인으로 추정되는 로버트 케네디도 있었다. CIA의 도청 자료에 따르면, 먼로는 로버트가 자신을 멀리하려하자 분노하여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로버트와의 통화에서 '비밀 일기장'의 존재가 있음을 언급하여 협박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개인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우려한 로버트가 사주하여 먼로를 타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먼로 사망 이후 약 20년이 흐른 1980년대에 미국 정부는 재수사에 나섰지만 결국 결과는 이번에도 자살로 종결됐다. 그렇게 36살에 시간이 멈춘 여배우는 수많은 전설과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를 남긴 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하늘의 별'이 됐다.
"계속 웃으세요. 인생은 아름답고 웃을 만한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먼로가 남긴 어록은 그녀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인생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먼로의 삶 역시 대단히 복잡하고 입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먼로가 단순히 화려한 스타나 섹스심벌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 거대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맞서고 사회변화에 앞장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감한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늘날까지 시대를 뛰어넘은 '불멸의 아이콘'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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