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차 공시생이 고향 뒷산에서 얻은 깨달음
[김상목 기자]
약 10년 전 출간되어 반향을 일으켰던 사회학 서적 제목이 떠올랐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일본 저자의 책이다. 해당 도서는 일본의 청년세대, 속칭 '사토리 세대'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펼쳐 보인다. '사토리 세대'는 장기복합불황에 빠진 지 20여 년이 지나 성장은 없이 정체된 일본 사회 내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청년세대의 특징을 진단하며 붙은 명칭이다. 분명히 현실이 암담하고 정규직 취업도 비좁은 문인 데다 사회 전체가 정체된 지 오래인데 정작 일본의 청년들은 현재에 만족하며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근대국민국가 수립 이후 경제사회 성장과 국가 차원의 동력 마련을 위해 형성된 '청년은 진취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한다!' 담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형상이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바다를 사이에 둔 한국사회 청년들은 일본 청년세대와 많은 사회문화적 공통점을 지니는데도 태도와 시각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물론 한국이 '행복의 나라'는 아니지만 '불행한 젊은이들'은 넘쳐났다. '헬조선' 담론이 팽배하고 기성세대와의 갈등 골은 심각해져만 갔다. 유사한 사회 변화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점점 '탈근대'로 향한다면, 한국은 여전히 상당한 국가적/사회적 일반기준에 미달한 절대다수가 스스로 자학하며 괴로워하는 기운으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아무리 미래지향적 교과 내용 개정이나 사회의 공식적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획일화는 거듭된다.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이나 사회 전체에 필요한 역량 육성이 아니라 오직 근거도 박약한 '한 사람 몫' 충족요건이 무의식까지 지배한다. 그렇게 청춘을 고시원에서, 공시학원에서 소모하며 기약 없는 좁은 문을 향해 여름철 전등갓에 뛰어드는 곤충들처럼 돌진하는 청춘 잔혹사는 계속된다.
▲ "늦더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동주'는 8년간 공무원시험 준비에 매진하며 플라워 디자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왔다. 회사에서 평판이나 일 처리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긴 시간 매진해온 공무원시험은 지지리 풀리지 않는다. 룸메이트 형 역시 동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 어느덧 30대에 들어선 동주보다 더 절박할 텐데도 형은 비교적 여유롭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룸메이트나 직장에서 업무로 자주 보는 직원이나 모두 동주에게 호의로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것 같은데 정작 동주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모양새다. 정식 직원으로 채용 제안이 들어올 정도이지만,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그는 사장의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만다.
처음엔 좀 조용한 성격이지만 무난해 보이던 동주의 고집스러움과 맹목적 집착이 살짝 거북해질 즈음, 그는 무작정 근교 여행길에 나선다. 처음엔 헤어진 전 여자친구를 찾는다. 하지만 막상 오랜만에 재회한 상대에게 동주는 별 의미 없는 안부와 과거 회상만 던질 뿐 딱히 별다른 알맹이도 없는 대화만 이어가고, 답답하고 짜증이 난 전 여자친구는 자신이 곧 결혼 예정임을 밝힌다. 그런 와중에도 분위기 파악을 안 하는지 못 하는지 동주는 맥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화를 이어가려다 기어코 거절을 당하고 만다. 이어서 그는 오랜만에 군대 후임을 만난다. 반가운 전우애를 나누는 것도 잠시, '어리버리'할 때는 자신이 지도하고 도움을 주곤 했던 후배가 이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은 상황을 목격한 동주는 자꾸 후배에게 술을 먹이려 하거나 허세를 부리지만 곧 공허한 감정에 빠진다. 그래도 여행을 떠나 보라는 후임의 권유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길을 떠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원과 화성 일대를 방황하듯 떠돌던 동주는 숙소 인근 놀이터에서 농구하던 남녀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보지만 만남은 지속되지 못한다. 대신에 그들이 소풍 장소로 소개해준 화성 고정리 공룡알 유적지를 찾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생활하던 그에게 중소도시의 시외버스 탑승은 그 자체로 난제다. 자연스럽게 어울려 구경 다니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행자들 틈에 끼어보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한 끝발 차이로 그는 무리에 섞이지 못한 채 묵묵히 뒤를 따를 뿐이다. 하지만 여행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번엔 혼자 여행 다니지 말고 사람도 좀 만나라며 군대 후임이 추천한 게스트하우스 숙박을 감행한다. 저녁에 바비큐 파티가 있다는 숙소 주인의 말과는 달리 일찍 대기하던 자리엔 홀로 온 남자 숙박객이 고작이다. 그래도 둘은 함께 고기를 굽고 술잔을 나누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마침내 나고 자란 고향 청주에 도착한다. 하지만 동주는 부모가 있는 고향 집으로 가는 대신 친척 집에 머문다(나중에 그가 부모님 집 주소도 모른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중학교 동창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리듯 연락을 전한다. 자기 포함 5명의 동기들이 술집에 모인다. 각자 뭐 하고 사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데, 나름대로 동주를 제외한 4명은 각각 자기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그중 학창시절에 마음이 있던 '윤정'이 '돌싱'이 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동주는 바깥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윤정을 찾아 대화를 나누지만, 딱히 별 진전은 없다. 동창들은 다음날 어릴 적 자주 다녔지만 한 번도 정상에 오른 적 없는 인근 산행을 결의하지만 막상 당일에 현장에 도착한 건 동주가 유일하다.
김이 샌 동주는 홀로 등산을 감행하지만, 하염없이 높고 깎아지를 것 같았던 산 정상은 정상답지 않게 밋밋할 뿐이다. 벤치에 드러누워 멍하니 쉬던 그 앞에 뒷걸음을 치며 옆 벤치에 중년의 여성이 자리를 잡고,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대화 중에 동주는 그 여성이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는 걸 깨닫지만 둘의 기억은 서로 어긋나기만 한다. 그렇게 짧은 즉흥 여행 뒤 동주는 서울의 숙소로 돌아온다. 과연 돌아온 주인공의 미래는?
▲ "늦더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감독은 전작 <종착역>에서 여자 중학생 4명의 미지로의 모험을 다뤘다. 이제 청소년기에 갓 진입하게 된 주인공들은 사진 동아리 과제를 촬영하기 위한 자신들만의 첫 여행에서 부모의 보호막 바깥에서 난생처음 당하는 위기를 거치며 어른의 세계로, 자신을 책임지는 성인이 되기 위한 첫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늦더위>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듯 여정의 로드무비다. 주인공 동주가 고향으로 돌아가 상봉하는 건 오랜 시간 왕래를 단절하고 지낸 부모가 아니라 바로 <종착역> 시절에 만났을 법한 중학교 동창들이다.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과거는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 같은 상투적인 내용이 아니라 한창 단독자로서 일어서기 위해 고민을 시작하던 청소년기의 출발점인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상태와 여정은 이상화된 모습으로 보이진 않는다. 초반에는 비호감에 가까운 캐릭터로서 면모를 드러낸다. 공무원시험이라는 자신의 설정 목표에 집착하는 동주는 외골수에 일방통행 직진이다. 30대에 들어선 참이라 주변에서 호의적으로 제안하는 기회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제한된 대인관계 속에서 공시에만 매진해온 게 문제인지 정중하게 거절하는 기술도 갖추지 못한 듯 보인다. 영화를 보던 중에 안쓰럽거나 혹은 타인의 진심을 외면하는 주인공의 행태에 불만을 가질 관객도 나올 법하다. 그리고 자격지심도 상당해 보인다. 동주가 아르바이트하는 회사 직원이 주선한 소개팅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살짝 올려치기 한다거나, 자신이 이것저것 조언해준 덕분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군대 후임에게 모텔 숙소를 호텔이라 둘러댄 뒤 슬쩍 원래 숙소로 돌아가는 풍경이 대표적이다.
그런 동주의 행보는 극적으로 압축된 캐릭터라기보다는 그저 현실에서 감독 본인을 포함한 청년세대의 자화상, 그것도 실제 주변에서 보이는 군상들이 실제로 겪는 삶의 애환이라기보단 마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재연극에 가까운 형상으로 다가온다. 무슨 말이냐면, <늦더위> 속동주의 행보와 변화는 실제 현실의 풍부한 단면을 사회적 주제의식과 연결해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치료 과정으로 창작자와 그가 속한 세대를 위로하고 숨 쉴 틈을 제공하려는 목적의식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에 과몰입하게 만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확립된 공식이 <늦더위> 감상에는 전혀 맞지 않게 된다. 대신에 마치 인물 다큐멘터리를 느긋하게 관조하며 자신이 경험한 것과 본인의 현재 상태를 대입해 관찰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효용은 명확하게 그 방향으로 좌표가 설정되어 있다.
그런 기능성에 충실하도록 영화의 전개는 구조화되어 있다. 맨 처음 주인공이 자신의 지난 몇 년간을 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찾는 건, 일산 호수공원의 '구여친'이다. 여기에서 동주는 한없이 찌질한 캐릭터의 극을 달린다. 전 여자친구로서는 몇 년 만에 연락하고 결혼 앞둔 상황에서 어떤 상황을 상정하며 마음 무겁게 나왔을 텐데, 그 장면에서 동주는 철저히 자기연민에 사로잡혀있을 뿐이다. 상대방으로선 '그래서 어쩌라고?'란 소리 안 튀어나오는 게 이상할 정도다. 군대 후임과의 재회에서도 큰 탈은 일어나지 않지만, 자격지심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후배를 곤란하게 만들 음주운전 권유를 거듭하는 건 이기적인 태도로 보기에 충분한 감이다.
▲ "늦더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필름다빈 |
이쯤 되면 한국독립영화에서 나르시즘에 빠진 별로 공감되지 않는 주인공 캐릭터의 또 다른 변형인가 싶을 것 같지만, 감독의 비전은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과는 거리가 명확하다. 자기연민으로 미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동주의 현재 상황과 그로 인한 편협함을 노출한 이야기는 그가 스스로 해답을 찾는 여정을 출발하면서 서툴고 불안하지만 주인공이 노력하고 있음을 찬찬히 공개하기 시작한다.
(전작의 출연진이 우정 출연한) 놀이터에서 만난 청소년들과의 시간은 진작 어른으로 자리를 잡았어야 했지만, 아직 정착하지 못한 동주의 처지를 직격해 버리는 찰나다. 그는 계속 그들 무리와 어울리고 싶었지만, 다시 찾아간 놀이터에는 몇 살 더 나이든 이들만 보인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은 청소년들에게 나이든 피터팬이 돌아가고자 해도 애초 불가능한 목표였던 셈이다. 그리고 '공룡알' 유적지에서 만난 공무원시험 준비 직전의 시절을 보내는 것만 같은 젊은이들을 곁눈질하며 거대한 공룡으로 깨어나지 못한 알과 자신의 심정을 겹쳐보기도 한다. 청운의 꿈과 성공의 야망으로 자신을 채찍질해 왔던, 분명 성실하게 도전했던 그의 꿈은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였지만 왜 실패한 걸까? 영화는 딱히 동주의 불운에 대해 콕 집어 설명해주진 않는다. 그저 운이 없었거나, 자신의 적성 대신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리라.
그런 실패 속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자신을 뒷바라지하며 기대를 멈추지 않은 부모와의 관계였을 테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동주는 어렵게 부모와의 재회를 도모하지만, 영화는 '좋은 게 좋은' 식으로 편의적으로 가족의 재회를 연출하진 않는다. 한번 어그러진 관계, 그것도 오랜 세월 지속해온 가족 내의 불편함은 타인들과 관계보다 오히려 개선하기가 몇 곱절 더 힘든 법이다. 그 대신 영화는 마음은 있지만 끝내 새로운 도전을 던지진 못하던 짝사랑 중학교 동창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주인공에게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임무를 다한다.
주인공 동주의 상태는 대략 이렇다. 세상은 숨 가쁘게 변화한다. 마치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혼자 길을 찾지 못한 채 '끝나지 않는 여름'을, 그것도 자기 홀로 치르는 중이다. 답답하고 기운이 쭉 빠지지만, 자신의 주위엔 오직 혼자 남은 상태다. '연옥'이 따로 없다. 결국에는 스스로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감행한 여행의 '종착역', 기껏 도달한 고향의 뒷산 정상은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실망하며 다시 방황해야 할 즈음, 우연히 상봉한 은사와의 대담에서 그는 충분하진 않아도 작은 불씨를 얻게 된다. 스승은 그러라고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주인공은 마음먹기에 따라 (공룡알 유적지 가는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주고받던 MBTI 용도처럼) 적당히 자신을 규정하되, 그에 구속되지 않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된다. 과거 자신의 삶이 그저 무익하게 흘려보낸 게 아니라 하나의 '시'였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청년세대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한국독립영화의 스펙트럼에 색다른 변주가 추가되었다.
<작품정보>
늦더위 Late Summer Heat
2024│한국│드라마
2024.05.22. 개봉│126분│12세 관람가
감독 서한솔
출연 기진우, 정미형, 이태진, 강윤정, 안민영
제작 모로가도서울
배급 필름다빈
2023 48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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