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쓴소리에 상을 준 대통령

서승욱 2024. 5. 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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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바람이 부는 건지, 마음이 흔들리는 건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들썩거린다. 총선 폭망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패장임에도 차기 전당대회 출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지난 총선보다 6석을 더 받았다"는 바람잡이까지 등장했다. 이런 '정신 승리'에 동의하는 국민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어차피 출마 여부는 "공부하겠다"고 떠난 '정치인 한동훈'이 양심과 염치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2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대통령실 제공=뉴스1]

화제가 되는 건지, 화제를 만들고 싶은 건지. 잠행인 듯 잠행 아닌 '한동훈식 잠행'도 이어진다.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가 자꾸 흘러나온다. 자택 인근에서 통화하며 걷는 뒷모습, 분홍색 골전도 이어폰을 착용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노출된다. "책은 집에서 봐도 되는데 굳이 왜"란 원초적 질문, "책 보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의도하지 않은 의도도 있다”는 복잡미묘한 관전평이 그래서 나온다. 일련의 '목격담 정치'가 윤석열 대통령의 정계 입문 전략과 비슷하다는 분석도 있다. 언론플레이에 능한 특수부 검사 출신 공통의 필살기일까.

「 청와대 찾아 쓴소리한 손학규
YS, 보건복지부 장관에 발탁
직언에 귀 여는 것이 진정한 소통

둘 사이의 닮은 점은 또 있다. 얼마 전 지인이 들려준 우스갯소리 한 토막이다. "검찰에서 함께 일했던 시절, 1시간 회의 중 55분은 윤 대통령이 말하고 자리를 뜬다. 나머지 5분 중 4분은 한동훈이 말한다. 나머지 1분을 여타 참석자들이 나눠 썼다더라." '59분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윤 대통령과 그에 필적하는 한 전 위원장의 다변(多辯)에 대한 풍자다. 실제로 한 전 위원장을 처음 접한 이들 중엔 "AI 수준" "술 안 마시는 윤석열"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기 말을 많이 하면 남의 말을 듣는 데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자신의 성공 방식, 자기 판단에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경청, 특히 자신에게 약이 되는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도 물리적으로 당연히 작아진다. 대신 "대통령 부부는 잘하고 계시는데 국민들이 오해한다" "보수를 살려낼 사람은 한동훈 당신밖에 없다", 이런 말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비단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정치 9단으로 불리는 역대 대통령들 역시 쓴소리를 부담스러워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상대방의 말이 길어지면 손목에 찬 시계를 자주 봤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갑자기 화초에 물을 주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들려준 반전의 일화가 귀를 잡아끌었다. "국회의원 시절 YS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YS 아들의 국정 개입 소문이 많이 돌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청와대에 들어가 YS에게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아들이 국정과 거리를 두게 해야 한다'고 한참 말하는데 YS가 손목시계를 보더라. 그래서 '아, 내 말이 듣기 싫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손 전 대표는 "귀에 거슬리는 말 때문에 찍힌 줄 알고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뒤 나를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하더라. 아주 놀랐다"고 했다. YS의 아들 사랑은 잘 알려져 있다. 한때는 주변에 "당장 총리를 해도 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아들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런 YS였지만, 아들을 겨냥해 상소를 올린 이를 전격 중용했다.

현재의 용산에서도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당장에라도 설치할 것 같았던 대통령 부인 담당 제2부속실이나 특별감찰관 관련 논의가 지지부진한 걸 보면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총선 직전 큰 역풍을 낳은 지난달 '의료 개혁 관련 51분 대통령 담화' 준비 과정에선 윤 대통령의 뜻과 달리 의대 정원 협상론을 폈던 비둘기파 인사들이 소외되고 결국 밀려났다는 얘기가 여권에서 돌았다. 자신의 말을 줄이고 쓴소리에 귀를 여는 건 소통의 시작이자 끝이다. 사실 이것만 실천했더라면 지금처럼 황망하고 처량한 정권의 처지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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