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후회합니다, 한번 더 아는 척 할 걸 [배우 김지성 에세이]
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김지성 기자]
그러고 보니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운동삼아 걷기 좋은 동네 개천길이 있다. 해질 무렵, 매일 같은 시간대에 나가보면 어제도 본 사람들, 산책 나온 반려견들과 마주치게 된다. 굳이 통성명을 나누지 않아도 늘 비슷한 옷차림들로 낯익어 가던 차에, 매일 보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세차게 할아버지를 추월하는 사람들 사이로 아장아장 느린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많이 닮아 보였다. 아니 그보다, 바닥을 끌며 걷는 검정구두에게 자꾸 시선을 빼앗겼다.
지난번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 가실 때, 말을 걸어 볼까도 생각했었다. 결국 그냥 돌아선 것이 내내 맘에 걸려, 한번 더 기회가 온다면 그땐 망설이지 않기로 다짐하던 차였다.
▲ 직접 구두를 벗겨 운동화로 바꾸어 신겨 드리고 끈을 매드렸다. |
ⓒ 김지성 |
또다시 벤치에 힘겨이 앉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먼발치에서부터 보인 순간, 부리나케 잰걸음으로 달려가 눈높이를 맞춰 앉고는 준비했던 말들을 꺼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가 미소로 답례했다.
"얼마 전부터 아버님을 오가면서 계속 뵈었어요."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근데, 아버님. 이렇게 무거운 구두로 오래 걸으시면 되레 건강에 좋지 않아요, 게다가 이렇게 더운 여름에. 운동화 신고 걸으셔야 해요."
"이 구두 하나밖에 없어. 이거라도 신고 걸어야지."
"괜찮으시다면 제가 운동화 한 켤레 선물해드려도 될까요?"
"좋지요."
할아버지는 크게 반색하셨다.
"아버님, 발치수가 어떻게 되세요?"
"잘... 몰라."
"제가 잠깐 구두 좀 살펴볼게요."
그렇게 구두 한 족을 조심스레 벗겨보니, 발바닥 모양 그대로 파이고 닳아버린 밑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 둘레에 희미하게 새겨진 치수 265를 어렵사리 발견하고서,
"아버님, 운동화는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집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집주소가... 에휴, 생각이 잘 안 나네."
할아버지는 셔츠의 왼쪽 가슴 포켓에서 천천히 뭔가를 꺼내신다. 목걸이 명찰에 쓰인 글씨들에는 주소가 없다.
병명 : 노인성 치매환자
성명 : 000
길을 잃었을시, 아래로 연락바람.
비상 연락망 : 핸드폰 번호 (010 - 000 - 0000 외 3개)
"아버님, 그럼 제가 운동화 산 다음에 직접 전화드릴게요."
"고마워요."
"네, 또 뵙겠습니다."
집에 와서 사진 캡처해 놓은 연락처를 자세히 보니, 자녀분들의 핸드폰 번호였다. 하마터면 가족에게 결례를 범할 뻔했다.
'일단 운동화 사고, 아버님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개천길 주변을 계속 걸어다녀봐야겠다. 뭐, 3~4일 안에는 뵐 수 있겠지. 그나저나... 나를 기억해 주시려나...?'
다음 날, 매장에 직접 가서 가벼우면서도 발볼이 넓은 운동화를 구입한 후, 비슷한 시간에 어제의 장소로 갔다. 쉼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개천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2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개천길 끝까지 갔다가 집 방향으로 되돌아오는데, 저 멀리 홀로 벤치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가 보였다.
평소와 달리 누군가 기다리듯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고 검정 구두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해진 신발 밑창도 이리저리 살피는 걸 봐서는 분명 어제 일을 기억하고 계신 거다.
"아버님~!"
부르며 달려가니 두 팔 흔들어 반갑게 맞아주시고, 운동화를 보여주기 전부터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직접 구두를 벗겨 운동화로 바꾸어 신겨 드리고 끈을 매드렸다. 다행히 신발도 꼭 맞는다. 할아버지가 손바닥으로 비어 있는 옆자리를 툭툭 치며 잠깐 앉으라 하셨다.
말씀대로 잠시 벤치에 머물러 무수히 우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운동화를 나란히 감상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또 고맙다고 하셨다. "아니요. 제가 마음이 편해져 더 좋습니다. 건강하세요, 아버님"라고 말씀드린 후, 뿌듯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아는 척 할 걸
그리고 며칠 동안 개천길을 가지 않았다. 자못 쑥쓰럽기도 하고, 굳이 운동화 신은 모습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주일이 흘렀을 즈음, 다시 마주친 할아버지는 내가 사준 운동화가 아닌 무거운 검정구두를 신은 채 여전히 바닥을 끌며 걷고 계셨다.
그날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개천길에 가지 않았다. 줬으면 그만인 것을, 실망이든 섭섭함이든 그 어떤 마음도 키우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흘러 반려견을 입양하고, 실로 1년 만에 다시 개천길을 걷게 되었다. 반려견과 매일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던 그 벤치를 수없이 지나쳤다. 사계절이 두 번 흘러갔지만 어디에도 당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후회가 된다. 그 날, 또다시 구두 신은 모습을 보았을 때, 회피하기 보다 한번 더 다가가 잔소리 비슷한 오지랖이라도 부려 볼 것을. 그럼 이후에도 계속 뵐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서서히 나를 잊으실 때까지. 쿨했던 것이 아니라 소심했던 지난 날로 인해 소중한 추억을 더 새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운동화였든, 무거운 구두를 신었든 간에 나를 향해 손 흔들며 환히 웃어주던 할아버지. 꼭 한번 다시 뵙기를 소원하며, 오늘도 그가 머물었던 개천길 주변을 어김없이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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