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1st] "아르네 슬롯! 랄라랄라라" 마지막까지 리버풀을 먼저 생각한 클롭
[풋볼리스트] 김희준 기자=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르겐 클롭 감독이 리버풀과 품격 있는 작별을 했다.
20일(한국시간) 영국 리버풀의 안필드에서 2023-2024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PL) 38라운드(최종전)를 치른 리버풀이 울버햄턴원더러스에 2-0으로 이겼다.
이날은 클롭 감독이 리버풀과 9년 동행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지난 1월 리버풀 공식 채널을 통해 '리버풀을 사랑하지만 에너지가 고갈됐다'며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무도 자신을 내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야만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클롭 감독은 지나온 팀들에서도 같은 길을 걸었다. 2008년 마인츠를 다시 승격시키지 못했을 때도, 2015년 보루시아도르트문트를 중위권으로 떨어뜨린 책임을 안을 때도 클롭 감독은 스스로 물러나는 걸 택했다. 자신이 더 이상 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미련 없이 팀을 떠나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다. 2월 잉글랜드 카라바오컵(리그컵) 우승에 성공했지만 3월 잉글랜드 FA컵에서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 탈락한 뒤 기세가 꺾였다. 한때 1위였던 리그 순위는 4월을 지나며 3위까지 떨어졌고,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에서도 8강에서 아탈란타에 무릎 꿇으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클롭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을 안아주면서 진한 포옹과 함께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절대 동요하지 않을 것 같던 버질 판다이크가 클롭의 품에 안겨 흐느껴도, 클롭 감독 덕분에 세계적인 풀백 반열에 오른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가 내내 눈물을 머금어도, 올 시즌 복잡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던 모하메드 살라가 눈시울이 붉어져도 클롭은 치아를 활짝 드러냈다.
고별식에서도 클롭 감독은 자신보다 리버풀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지금쯤이면 슬픔으로 무너져내릴 줄 알았는데 정말 행복한 기분"이라고 운을 뗀 클롭 감독은 자신이 아닌 팬들과 선수들 스스로가 '의심하는 자에서 믿는 자로' 바뀌었다며, 리버풀이 지금처럼 계속 믿음을 갖고 발전한다면 자신이 없어도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언제나 우승 경쟁을 했던 맨체스터시티와 1경기만 다시 하고 싶다거나, 사임 발표 후 경기 중에 자신의 응원가를 부르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무시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안필드에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하이라이트는 자신의 후임을 위한 응원가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클롭 감독은 갑자기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말하더니 대뜸 "아르네 슬롯! 랄라랄라라"라며 2024-2025시즌부터 리버풀을 이끌 아르네 슬롯 감독의 응원가를 목청껏 외쳤다. 팬들은 클롭 감독의 선창에 화답하며 경기장 가득 슬롯 감독의 응원가를 불렀다.
이는 클롭 감독이 처음 부임했을 때 팬들이 불러준 응원가를 개사한 버전이었다. 즉 클롭 감독은 자신에게 해준 것처럼 슬롯 감독에게도 무한한 지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축구 감독이 구단과 좋게 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후임 감독은 전임 감독이 떠난 후에야 팀에 모습을 드러낸다. 후임을 위한 응원가는 팀에 모든 걸 쏟아부은 뒤 미련 없이 물러나는 감독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셈이다.
'노멀 원(Normal one)'으로 유명한 리버풀 감독 취임 기자회견에서 클롭 감독은 "도르트문트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이 곳에 올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곳을 떠날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였다"고 말한 바 있다. 리버풀에 처음 입성할 때만 해도 클롭 감독이 리버풀을 살리지 못할 거라는 의심이 있었지만, 클롭 감독은 서서히 팀을 발전시킨 끝에 UEFA 챔피언스리그와 PL 우승컵 등을 선사하며 모두를 믿는 이들로 바꿨다.
작별 인사를 마친 클롭은 안필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그니처와 같은 '어퍼컷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리버풀 팬들은 팀을 대표하는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는 것으로 화답했다.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클롭 감독은 팬들을 등지고 복잡미묘한 표정을 안은 채 경기장을 떠났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리버풀 X(구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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