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요원이 된 재즈 가수의 문제적 삶의 기록

김상목 2024. 5. 2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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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스텔라>

[김상목 기자]

 영화 <스텔라> 포스터 이미지
ⓒ ㈜뮤제엔터테인먼트
 
피해자를 가해자로 끌어들이기: 오래된 수법

쿠엔틴 타란티노의 2009년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악역 캐릭터 중 하나를 세상에 선보였던 바, 바로 유대인을 색출하는 무장친위대 대령 '한스 란다'(배우 크리스토퍼 발츠)였다. 여러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행사하며 자그마한 체구와 겉으로는 온화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란다 대령이 선보이는 마치 거미줄처럼 옥죄는 심리적 압박에 상대는 끝내 굴복하고 만다. 물론 그의 치명적 언어 배후에는 나치독일이라는 살인기계가 든든히 뒷배가 되어주고 있었지만, 유독 유대인 색출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한스 란다 대령은 자신이 '유대인처럼 생각할 수 있기에 그들이 어떻게 도주하고 어디에 숨을지를 전부 알고 있다' 하며 자신만의 비밀을 자랑하듯 읊어대곤 한다.

물론 한스 란다 대령의 사례는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개 가해자는 피해자를 빌미를 잡아 얽어매는 데에는 유능할 수 있어도 온전히 상대의 심리를 이해할 수도, 이해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고도로 체계화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상대를 간파해야만 한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마치 초능력자를 보는 것처럼 고도로 숙련된 소수 전문가나 기술자가 아니라 바로 희생의 대상 중 일부를 끄나풀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처지를 악용해 아주 약간의 편의나 혜택만 제공해도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선악의 윤리를 내다버리면 이보다 더 비용 대 효과 '가성비'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국가 차원으로 조직적인 폭력과 독재세력은 늘 자신의 공격대상 가운데 '제5열'을 만들어 활용한다. 20세기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학살극인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나치독일은 이 분야에서도 최고수준의 전문가였다.

나치독일은 자신들이 창조하려던 새로운 유럽질서에서 모든 소수자를 제거하거나 노예화할 심산이었다. 유대인은 물론 '열등 인종' 슬라브인, 집시, 장애인 모두 해당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도 치러가면서 그 무수히 많은 숙청대상을 일일이 솎아내는 건 역량의 한계가 명백했으니 이들은 효과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속으로는 멸시하면서도 부역자를 줄곧 양산해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예로 들자면 일단 나치독일은 집권하자마자 단계적으로 유대인을 주변부로 내몰기 시작한 뒤, 주요 도시마다 (중세부터 반유대주의 상징이던) '게토'를 만들어 재산을 빼앗은 뒤 강제로 수용했다.

이 소개작업에서 회유와 협박을 병행해 유대인 커뮤니티의 구성원 일부를 '유대인 경찰'로 조직해 일을 맡겼다. 친일 부역자와 판박이인 이들은 게토의 치안을 관리하고 나치에 협력해 동포를 억압했다.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유대인 경찰에게 제시된 달콤한 안전보장과 곤봉을 휴대해 권위를 세워준 조치는 저비용 고효율로 효과적인 게토 통제를 성사시켰다.

전쟁이 격화되고 유대인 말살을 위한 '최종계획'이 발효되자 '게토'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직행한다. 수용소에선 간수라 할 '카포 KAPO'가 유대인 경찰의 역할을 담당했다. 의도적으로 사회에서 포악한 범죄자였던 이들이 대거 특채되어 (자기 손에 피 묻히기 꺼렸던 독일인 대신) 본인과 같은 처지의 수용자들을 학대하고 괴롭혔다. 그 대가로 이들은 영양실조로 다들 천천히 노동력을 착취 당하다 죽어가는 와중에 배불리 먹고 개인실을 제공받는 특권을 누렸다. 온정적인 카포는 주변에 의해 밀고 당해 자신이 통제하던 수용자 신세로 전락하고 가장 악질적인 자들이 끝까지 살아남았지만 대개 수용소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마지막에 '처리'되곤 했다. 이들 상당수는 전후 전범으로 추적 당해 재판에 서거나 린치를 당해 사라졌다.

후대 관점에서 이들은 변명이 불가능한 부역자일 뿐이다. 하지만 막상 따져보면 그들 개별의 가담 이유와 조건은 제각각이었고, 일부는 극악의 환경 속에서도 선행을 하거나 봉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동포를 배반하고 이용하며 이익을 얻거나 나치독일도 혀를 내두를 만큼 악독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대개 미디어에선 그런 존재들을 집단적인 하위 악인 유형으로 뭉뚱그리고 소수의 양심적인 이들을 특화시켜 묘사한다. 하지만 과연 인간이란 복잡다단한 존재가 그렇게 선/악을 딱 나눠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떨 땐 선한 모습을, 어떨 땐 악한 면모를 선보일 수 있는 게 인간이란 종의 흥미로움이 아닐까? 영화 <스텔라>는 바로 그런 모순적인 존재의 일대기를 그려내려는 도전이다.

'밝은 미래' 꿈꾸던 재즈싱어에게 닥친 일
 
 영화 <스텔라> 스틸 이미지
ⓒ ㈜뮤제엔터테인먼트
 
금발에 푸른 눈, 전형적인 백인 여성에다 무리 중에 대번에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있다. 그는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노래 연습을 하며 화려한 브로드웨이 무대로 진출을 꿈꾼다. 가수 지망생으로 보이는 그는 곧 자신이 속한 재즈 밴드와 함께 연습에 나선다. 뛰어난 재능과 빛나는 외모가 받쳐주기에 정말 본인의 소원처럼 운만 따라준다면 성공할 것처럼 빛난다. 영화의 주인공 '스텔라'의 등장이다.

하지만 때는 1940년 8월이다. 부유한 중산층 집안의 외동딸이지만 그와 가족의 상의에는 노란색 마크로 '다윗의 별' 표식이 붙어 있다. 스텔라는 유대인인 것이다. 평범한 게르만 외모를 가졌지만 나치독일의 인종분리법에 의하면 그가 유대인이란 점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시기에는 유럽대륙에서 나치에 맞서던 프랑스가 정복당하고 사실상 유럽의 패자로 독일이 거칠 게 없던 시절이다. 다가오는 위협 앞에서 스텔라의 가족은 지인을 통해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미 폭주하는 수요 가운데 그들의 가족은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상황에, 자신의 밴드 구성원들도 하나둘 가족이 끌려가는 상황이라 연습도 엉망진창이다. 그런 판국인데도 스텔라는 공연을 성공시켜 미국으로 건너갈 희망을 놓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물려받은 핏줄 때문에 이렇게 꿈은커녕, 목숨마저 위태로워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해 어떻게든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줄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갈 기회만 노린다. 하지만 일은 희망대로 풀리지 않는다.

시간이 흘렀다. 1943년 2월, 전 유럽은 여전히 나치독일의 지배하에 있으나 전쟁은 끝날 줄 모른다. 화려한 무대와 연습실에서 노래하던 스텔라는 침침한 공장에서 군수물자를 만드는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노란 표식으로 낙인이 찍힌 채 중노동을 마치고 게토 구역으로 귀가하는 일상에는 어떤 희망도 엿보이지 않고, 어두운 소문은 그와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한다. 남편은 실의에 빠져 의기소침해 있어 별 힘이 되지 못한다. 이러다간 가수의 꿈은 고사하고 목숨 부지도 위태로워 보인다. 스텔라는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것저것 위험한 시도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도 감당하지 못할 나치독일의 통제 속에서 나이도 어리고 사회경험도 많지 않은 그가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위험을 타개할 요술 방망이가 뚝딱 나타날 리 없다.

추락천사의 수난과 타락 일대기
 
 영화 <스텔라> 스틸 이미지
ⓒ ㈜뮤제엔터테인먼트
 
그때 지인이 소식을 전한다. '롤프'라는 브로커가 위조 신분증을 기막히게 잘 만든다는 것이다. 그와 접촉한 스텔라는 부모님과 자신의 위조 신분증을 마련한 김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롤프와 동업해 위조 신분증 사업을 개시한다. 돈도 벌고 사람도 구하고 일거양득으로 보였을 테다. 하지만 신분증을 마련했다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하나가 생각나는 법이다. 그렇게 어느새 스텔라는 위험한 사업에 몰두하며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거리도 활보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서서히 연합군의 반격이 거세지니 이대로 몇 년만 잘 견디면 지연된 꿈도 이룰 것 같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게다가 밴드 동료였던 '잉게'가 자기가 살기 위해 롤프와 자신을 밀고하는 바람에 스텔라는 1943년 7월 12일 체포되고 만다. 불과 5개월여의 '장미빛 인생'이던 셈이다. 비밀경찰 '게슈타포'는 유대인 요원들을 두고 거리 곳곳에 은신한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이 요원들은 유대인임에도 나치독일 장교와 어울리며 안정된 생활과 함께 동포를 체포해 실적을 올리면 수당도 받는다. 당장 자기 목숨은 물론 부모님과 남편도 위험에 처하자 스텔라는 여러 차례 탈출도 시도하고 동포를 밀고하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궁리해 보지만 결국 게슈타포의 손바닥 안이다.

마침내 스텔라는 살아남고자 스스로 유대인 요원이 되겠다고 자청한다. 그리고 실적을 올리기 위해 롤프도 끌어들인다. 이미 그와는 원래 남편 대신 공범자로서 관계를 형성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은 부부로 생활하게 된다. 그렇게 2달여의 투옥 후 스텔라는 롤프와 함께 유대인 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1943년 9월부터 나치독일이 패망하는 1945년 5월까지 2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스텔라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마지못해 유대인 요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물론 그의 임무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유대인을 색출하는 일이다. 그 대가로 스텔라는 일신의 안위는 물론 부모님의 안전도 챙긴다. 롤프와 스텔라는 공범자로서 때로는 동병상련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무자비해지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동족혐오로 변해간다.

하지만 게슈타포에게 유대인 요원은 그저 소모품이자 '주구'에 불과할 뿐, 동등한 동맹자일 리 없다. 상사는 조금만 실적이 부진하면 스텔라를 위협하다 어르며 그의 실력 발휘를 종용한다. 양심에 찔릴 때면 스텔라는 못 이긴 척 약간의 눈감음도 행하지만, 자신을 부역자로 욕하는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 욱 하는 마음에 표독스럽게 자신의 지인들도 함정에 빠뜨리곤 한다. 부모님을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대신 노역은 해도 목숨은 부지할 법한 다른 수용소로 옮기게 할 때는 눈물을 참지 못하지만, 자신을 성토하는 유대인들에겐 내가 뭘 잘못했냐며 눈꼬리를 치켜뜬다.

그리고 전쟁이 (역사책에 기록된 대로) 나치의 패망으로 끝난 뒤 스텔라의 행방은 묘연하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할 수밖에 없는 그의 전후 삶이 영화 후반부에 공개되기 시작한다.

어느 특출한 유대인 요원의 흥망성쇠
 
 영화 <스텔라> 스틸 이미지
ⓒ ㈜뮤제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제목처럼 실존인물 '스텔라 골드슐락(1922-1994)'의 일대기를 극화한 구성을 취한다. '죽음의 금발'이란 별칭으로 게슈타포가 부르던 그는 실제로 영화 속 스텔라와 거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영화 속에선 재즈 가수를 꿈꾸지만, 실제 인물은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이었다) 그는 전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의 수용소에서 10년간 강제노역을 치른 뒤 독일로 귀환했지만, 수백-수천 명에 이르는 희생자 중 생존자들이 그의 귀국을 포착해 8개 혐의로 전범 재판에 선다. 하지만 6개 항목에서 무혐의, 2개 항목은 유죄판결이 났음에도 소련에서 치른 형기 때문에 풀려나 3번째 결혼 후 조용히 살아갔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그렇게 평안하지 않았다. (온라인 검색으로 그의 말년을 확인할 수 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스텔라 캐릭터를 마치 기록영상을 보는 것처럼 관객은 화면에서 목격하게 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운디네>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남녀통합) 주연 연기상을 수상하며 독일을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선 폴라 비어는 이 영화에서 마치 실존 인물이 직접 등장한 것처럼 가공할 수준의 동기화를 선보인다.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주인공이 어느새 노란 딱지를 붙인 채 먼지를 뒤집어쓴 절망적인 여공이 되었다가, 게슈타포의 고문에 영혼이 발가벗겨진 것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끔찍한 죄수로 순식간에 말 그대로 변신해버린다. 아직 20대인 나이에 어떻게 저런 연기가 가능할지 경이로울 정도다. 영화 내내 폴라 비어는 스텔라로 빙의해 울고 웃고 춤을 추다 자포자기해 비명을 지르기를 거듭한다. 그저 가수로 성공하고 연인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젊고 재능 넘치던 가수는 역사의 잔혹한 장난 앞에서 그야말로 노리개감이 되어간다.

물론 스텔라의 매 순간의 선택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명분이 존재한다.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러시안룰렛 게임처럼 자신을 희롱하며 격발하려는 게슈타포 앞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남편의 생사까지 걸려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 평범한 우리가 뭔들 못할까? 그 역시 그런 무력한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는 결단 때문에 단죄 당할 때 스텔라의 분노는 폭발한다. 그 순간부터 스텔라의 타락은 자기합리화로 치닫기 시작하고 그를 막을 수단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고 그를 매도하는 동료 유대인들을 욕할 수도 없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친분과 인연을 이용해 동포를 팔아먹는단 말인가? 하지만 스텔라로선 달리 선택지도 없고, 한 번 저지르고 나니 자포자기 상태로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그런 부역자의 심리상태를 손바닥 보듯 꿰뚫는 게슈타포가 서 있다.

유대인 경찰이나 카포처럼, 혹은 안네 프랑크 가족의 밀고자인 익명의 누군가처럼 유대인 일반이 일관된 태도와 자세로 나치독일의 학살에 상대했을 리 없다. 저항운동은 소수의 전유물이었고, 유럽의 유대인들은 단일한 집단이라기보다는 그저 혈통을 물려받은 이들일 뿐 각자의 가치관과 삶은 천차만별이었다. 영화 속 스텔라 가족은 딱히 유대교를 믿거나 유대인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은 흔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스텔라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는 독일 제국군 소속이었을 테다. 그러나 나치에겐 그저 유대인 1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스텔라는 자신부터 과거 동료에 의해 밀고를 당해 체포된 처지다. 내가 살아야지 하는 정당화는 시작부터 스텔라의 뇌리 깊숙이 박혀 있었을 테다.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권유했지만 훨씬 더 악랄하고 집착적으로 동포를 괴롭히는 롤프와 어울리면서 스텔라는 구르는 돌처럼 악업을 쌓아나간다. 그에게 색출된 희생자로선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부역자 주구에 불과하지만, 정작 전쟁이 끝나고 나서 법정에서 진술하는 스텔라에게 남은 건 목숨을 부지한 것 외에 별다를 게 없어보인다. 아이러니의 극치다.

마지막 동아줄을 끝내 잡지 못한 '괴물'의 운명
 
 영화 <스텔라> 스틸 이미지
ⓒ ㈜뮤제엔터테인먼트
 
스텔라의 전범재판 장면은 많은 걸 고민하게 만든다. 그를 성토하는 피해 생존자들의 울분이 폭발하고, 살아남기 위해 갖은 논리로 증언을 무력화하려는 변호인, 그리고 무언으로 스텔라를 응시하며 그를 이해할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재판관이 자신은 죄가 없다며 항변하는 스텔라의 가면을 쓴 표정과 교차하며 복잡한 풍경화를 형성한다. 여기에 스텔라와 밴드 시절부터 절친한 우정을 나누던 친구인 '조니'와의 대화는 화룡점정을 이룬다.

스텔라는 지인들을 팔아넘기면서도 차마 자신이 순수하던 시절, 꿈을 상징하는 것 같은 친구 '조니'는 보호하려 애썼다. 실제로 그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스텔라는 그런 자신의 호의를 조니가 증명해 재판에서 유리해지길 바란다. 조니 역시 자신이 몰랐던 실체에 당혹해 하면서도 스텔라를 위해 증인이 되어주려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조니 역시 장기 말처럼 변호를 위한 도구로 바라보는 스텔라의 시선에 자신이 알고 있던 친구가 아님을 깨닫고 만다. 조니는 친구로서 과거를 그렇게 묻어두고 살 순 없다며, 솔직히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 참작을 받으라고 우정으로 권하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괴물'이 되고 만 스텔라는 누구의 편인지 택하라며 조니를 몰아세운다. 하지만 조니의 지적은 옳았다는 것이 훗날 증명되고 만다.

영화는 스텔라를 연기한 폴라 비어의 놀라운 연기에 힘입어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이 논쟁적인 주인공이 전쟁 기간 어떤 극한의 환경에 처했고 어떻게 갈팡질팡 행보를 이어갔는지 관객에게 직접 재연하려 한다. 그 때문에 은근히 1인극을 보는 기분이 들 순간이 적지 않다. 주인공의 주요한 태도 변화 분기점마다 마치 연극에서 막이 올랐다가 내리듯 암전이 툭툭 끊어지듯 등장한다. 매끄러운 편집 연결 솜씨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당황스러운 단절의 찰나가 연속되는 셈이다. 영화적 전개로선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될 구석이다. 하지만 법정에 선 스텔라의 뇌내망상으로 재현된 과거 실존적 기억을 영사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적응하기 수월할 테다. 마치 재판에 회부된 스텔라가 강제로 착석해 텅빈 극장에서 홀로코스트 기록영화를 봐야하는 것처럼 관객 역시 재판정의 청중이 되어 듣고 보기 싫어도 스텔라의 진술을 체험하는 식이다.

스텔라는 그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뿐인 피해자였다. 마치 나치독일에게 절멸 당할 위기에 처한 희생자였던 유럽 유대인들이 시온주의로 무장하고 자신들이 안전할 그들만의 국가를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해자로 변질되는 비극을 개인 차원에서 치룬 셈이다. 하지만 그가 생존을 위해 택한 방도는 그를 동시에 가해자(의 말석이자 도구이자 주구)로 위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스텔라는 '괴물'로 일그러지고 변형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주인공의 심리변화는 사이코 드라마처럼 관객에게 전달되고, 점점 스텔라는 립스틱을 가면을 착용하듯 짙게 바르기 시작한다. 그 방어막을 벗어던지지 않고서는 그의 영혼은 자신의 원죄와 전쟁의 구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니가 판결을 앞두고 스텔라에게 제안했던 새 출발을 위한 고백과 참회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끝내 무너져내리는 벼랑의 발판에서 동아줄을 움켜쥘 마지막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스텔라의 운명은 다른 이름 없는 슬픈 괴물들과 한배를 타게 되고야 말았다.
 
<작품정보>
스텔라 Stella. A Life.
2024│독일│전쟁/드라마
2024.05.22. 개봉│121분│15세 관람가
감독 킬리안 리드호프
출연 폴라 비어(스텔라 역), 야니스 니에브외너(롤프 역), 요엘 비스만(조니 역)
수입 ㈜미디어소프트필름
배급 ㈜뮤제엔터테인먼트
 
27회 말라가영화제 관객상
20회 취리히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47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5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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