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같았던 59년, 윤여정의 인생 캐릭터 3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윤여정만큼 입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의 삶과 배우 경력을 톺아보면 이 질문에 답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데뷔작부터 연기를 그만 두려 했던 59년차 배우 윤여정은, 10여 년의 경력 단절 후 생계형 연기에 나서 끝내 성공을 거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젊은이들보다 옷을 더 잘 입는 76세의 패셔니스타이자 수많은 어록으로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 '어른다운 어른'이기도 하고요.
그의 배우 활동도 마찬가지예요. 그의 이름을 들으면 예민한 할머니 캐릭터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윤여정을 '팜므 파탈'로 기억할 테니까요. 그런 그의 59년 배우 여정을 미국 아카데미영화박물관이 조명합니다. 이곳에서는 17일(이하 현지시각)부터 25일까지 '윤여정: Youn Yuh-jung'이 열리고 있어요. 이번에 상영되는 작품은 〈화녀〉, 〈바람난 가족〉, 〈고령화 가족〉, 〈계춘할망〉, 〈죽여주는 여자〉, 〈찬실이는 복도 많지〉, 〈미나리〉 등 9편입니다.
윤여정은 현지에서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높아져서 생긴 일"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아카데미 측 반응은 달라요. 박물관은 "한국 영화사에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배우 윤여정의 회고전을 선보이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윤여정의 숱한 '인생 캐릭터' 가운데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세 작품 속 캐릭터를 골라 소개합니다.
윤여정의 스크린 데뷔작 〈화녀〉는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영화 〈하녀〉를 1970년대 시대상에 맞춰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당시 윤여정은 신인임에도 제8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탈 만큼 강렬한 연기를 펼쳤는데요. 우선 〈화녀〉의 전체적 내용은 〈하녀〉와 유사합니다. 한 단란한 가정에 하녀가 들어와 남편과 정을 통하고, 점점 커지는 욕망을 실현하려다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스토리죠.
다만 〈화녀〉의 명자(윤여정)는 원작의 하녀(이은심)와는 다릅니다. '이은심 버전' 하녀가 애초부터 주인집 남편을 유혹하는 '욕망의 화신'이었다면, '윤여정 버전' 하녀는 그렇지 않거든요. 순진한 시골 처녀 명자는 남성들의 욕망에 노출되며 결국 변화하는데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일깨워진 욕망과 생존 본능이 맞물려 태어난 명자 캐릭터는 원작의 하녀보다 더 일그러졌고, 그래서 더 애처로운 존재입니다.
윤여정은 〈하녀〉보다 더 복잡해진 심리극의 주인공을 신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연기력으로 소화했는데요. 단정한 차림을 한 채 살짝 눈을 내리 깐 극 초반의 명자와 풀어헤친 머리, 화려한 복장을 하고 짐짓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극 후반부의 명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 입체적 면모 때문인지 윤여정도 후일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 영화'로 꼽기도 했죠. 윤여정은 임상수 감독이 다시 한 번 리메이크한 〈하녀〉에도 출연해 '인간 오마주'로서의 역할도 해냈습니다.
2016년, 윤여정은 정반대의 '할머니'를 연기했습니다. 〈계춘할망〉에서는 12년 만에 잃어버린 손녀를 찾은 해녀 계춘을,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박카스 할머니'를 맡았죠. 이 대비가 유독 강렬했던 건 〈죽여주는 여자〉에서 보여 준 파격적 변신 덕분입니다. 이재용 감독은 이 작품에서 빈곤과 존엄사를 비롯한 노인 문제와 사회적 소수자 이슈를 다루는데요.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결국은 말년까지 매춘을 하게 된 소영(윤여정)의 인생에 이 모든 것이 담겼습니다.
극 중 소영은 파고다 공원의 '죽여주는 여자'입니다. 트렌스젠더의 집 한 칸을 빌려 겨우 살아가는 그에게 더 이상 떨어질 나락 따윈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성병을 고치러 간 산부인과에서 갈 곳 없는 '코피노' 꼬마를 발견하고는 기어이 그 아이를 품고 맙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모두를 '품어 왔던' 소영 다운 행동이었죠. 소영의 포옹은 그저 생존하기 바빴던 주변을 따뜻하게 움직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재용 감독의 위트를 찰떡 같이 받아내는 윤여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노인의 성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며 찾아온 어린 감독이 "(예전엔) 미군들을 상대하신 건가요?"라고 묻자 "그럼 일본군 상대했겠어? 그 정도로 늙진 않았어"라고 답하는 대목은 개봉 당시에도 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미나리〉는 윤여정에게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겼습니다. 2020년 세계 유수 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은 거의 윤여정의 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이 작품은 아카데미의 윤여정 회고전 첫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10년이 넘는 미국 이민 생활에서 겪은 애환들이 영화와 순자(윤여정)에게 녹아든 덕분일 테죠.
이 작품은 1980년대 미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가장 늦게 이 가정에 뛰어든 순자에게 유독 눈길이 갑니다. 미국에서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아들 부부를 위해 손자를 돌보려 비행기에 탄 순자는 영어 한 마디 할 줄을 모릅니다.
손자 데이빗(앨런 김)에게는 밟아 본 적 없는 모국 땅처럼 낯설고 어색한 할머니죠. 그러나 순자는 〈계춘할망〉 속 계춘의 따뜻함과 〈죽여주는 여자〉 속 소영의 포용력으로 흩어진 미나리 씨앗 같던 가족들을 온전히 심어냅니다. 그래서 영화는 순자가, 또 윤여정이 그가 어디에든 뿌리를 내릴 수 있고, 또 푸르게 자라는 '미나리' 같은 인물이었음을 확인케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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