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경' 대통령 사망, 유력 후계자 잃은 이란 어디로

윤현 2024. 5. 2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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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시 대통령, 헬기 사고로 숨져... 정치적 전환기 올까

[윤현 기자]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왼쪽)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이란과 아제르바이잔 국경 지대에서 열린 기즈 갈라시 댐 준공식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라이시 대통령은 댐 준공식 참석 후 타브리즈로 돌아오던 중 탑승한 헬기가 산악 지대에 추락하면서 사망했다. 2024.05.20
ⓒ 연합뉴스
  
이란의 강경 보수 정권을 이끌던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헬기 추락 사고로 돌연 사망하면서 중동 정세가 격랑에 휩싸일 전망이다.

이란 정부는 20일(한국 시각) 라이시 대통령이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함께 헬기에 탑승한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 타브리즈 지역 성직자 이맘 아야톨라 알 하솀, 말리크 라흐마티 동아제르바이잔 주지사 등 당국자 3명과 조종사, 경호원 등 9명이 전원 숨졌다.

라이시 대통령은 전날 북서부 동아제르바이잔주에서 열린 기즈 갈라시 댐 준공식에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뒤 타브리즈의 정유 공장을 둘러보기 위해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했던 헬기는 짙은 안개와 폭우 등 악천후 속에 비행하다가 동아제르바이잔주 중부 바르즈건 인근의 디즈마르 산악 지대에 추락했으며, 헬기는 불에 완전히 타버린 것으로 전해졌다.

반대 세력 숙청... '죽음위원회' 일원 지목된 라이시

이슬람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난 라이시는 현재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제자가 되어 신학을 배웠다.

18세 때였던 1970년 친미 정권인 팔레비 왕정 반대 시위에 참여한 라이시는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출범하고 2년 뒤인 1981년 검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강경파의 반체제 인사 숙청을 이끌었다. 

하메네이의 신임을 얻은 라이시는 사법부 수장을 지냈고 최고 지도자의 사망 또는 유고 시 후임을 결정하는 국가지도자운영회 부의장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국제 인권단체들은 5천 명이 넘는 정치범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이른바 '죽음위원회'(death committee)의 일원으로 라이시를 지목했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비인간적인 조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라이시를 2019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란 테헤란에서 시민들이 헬기 추락 사고로 실종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무사 생환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이란 정부는 라이시 대통령과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 등이 탑승한 헬기가 산악 지대에 추락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2024.05.20
ⓒ 연합뉴스
 
영국 BBC 방송은 "라이시는 자신이 사형 선고 과정에 참여했다는 의혹을 줄곧 부인했으나, 당시 사형 선고들이 하메네이의 종교 판결에 따라 정당하게 이뤄졌다고 주장해 왔다"라고 전했다. 

강경파의 지지를 배경 삼아 2021년 대선에 출마한 라이시는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해 그해 8월 취임했다. 이란의 대통령 임기는 4년이며,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란 헌법수호위원회가 라이시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개혁 및 온건파 후보들을 실각시켜 출마를 막고, 대선 방식도 라이시한테 유리하도록 만들자 이란 국민들은 투표소에 가지 않음으로써 불만을 표출했다.

당시 AP통신은 "이란 대선은 투표가 아니라 라이시를 위한 대관식(coronation)에 가까웠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유력 후계자 잃은 이란... 내부 분열 빠질까 

미국의 제재를 받는 인물로는 처음으로 이란 대통령에 오른 라이시는 초강경 노선을 펼쳤다. 이란 정부는 2022년 한 여성이 히잡을 바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의문사한 사건으로 촉발됐던 이른바 '히잡 시위'를 유혈 진압하면서 500여 명이 숨지고 2만 2천여 명이 구금됐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핵 합의를 파기하자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했고, 가자 전쟁이 발발하자 이스라엘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도 했다.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사회의 제재로 이란의 통화 가치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청년 실업률이 치솟는 등 경제난에 시달렸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라이시 대통령의 보수 정권은 억압적인 사회 규칙을 되살리고, 반대 세력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소외시키면서 대다수 이란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신정일치 체제인 이란은 36년째 집권하고 있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실권을 잡고 있으며 대통령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적다. 문제는 라이시 대통령이 하메네이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이자 사실상의 이인자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란이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 분열에 빠지고, 중동 정세도 한층 위험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사망을 보도하는 영국 BBC 방송
ⓒ BBC
 

미국 CNN 방송은 "이란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사망한 헬기 추락 사고는 가뜩이나 이란과 중동 정세가 어려운 시기에 발생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제 반정부 시위는 대부분 멈췄지만 많은 이란인들, 특히 억압적인 신정일치 체제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젊은이들 사이에는 성직자 리더십에 대한 반대가 여전히 깊이 자리 잡고 있다"라고 짚었다. 

이란 헌법은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50일 이내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2명의 부통령 중 가장 선임인 모하마드 모흐베르가 일단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보궐선거를 주관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사고는 이란이 고령인 하메네이가 몇 년 안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며 정권 교체에 대비하고 있던 시기에 벌어졌다"라며 "이란은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으로 정치적 전환기의 분위기가 더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란과 함께 '저항의 축'으로 불리며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예멘 후티 반군 등은 깊은 애도와 연대를 표했다. 반면에 이란과 대립각을 세워온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사회는 최대한 반응을 삼가면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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