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화계를 놀라게 한 한국 관객의 '비밀'

성하훈 2024. 5. 2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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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네필의 시대 : 한국영화문화에서 비디오필리아와 시네필리아>

[성하훈 기자]

 『시네필의 시대 : 한국 영화문화에서 비디오필리아와 시네필리아』
ⓒ 영진위
 
부산영화제가 출범했던 1996년. 부산을 찾은 해외 영화인들은 거리의 관객들에 놀라워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20~30대의 청년들이 극장을 채우고 있는 것에 "젊은 관객이 넘쳐난다"며 경이로움을 나타냈다.

특히 해외 영화인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영화 상영 후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젊은 관객들의 질문 수준이었다. 보통은 해외 어느 영화제든 제작비나 배우 등에 가벼운 질문이 일반적이었다는데, 한국 관객들은 미학적 질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부산에 와서 뭔가 심기가 불편해 짜증을 내던 감독도 막상 관객과의 대화를 한번 하면 표정이 바뀔 만큼 한국 젊은 관객들의 심도 있는 질문은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2000년 부산영화제를 찾은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첫 질문부터 범상치 않자 영화전공자들 손들어 보라고 했다고 했던 것은 재밌는 일화다.

1990년대 해외 영화인들이 궁금해했던 열혈 한국영화 관객들의 실체를 밝히는 책이 최근 발간됐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50주년 기념 총서 작업으로 펴낸 이선주 교수(부산대 영화연구소)의 책 <시네필의 시대 : 한국 영화문화에서 비디오필리아와 시네필리아>(아래 <시네필의 시대>)는 관객 문화의 기원을 찾고 조명한다는 점에서 열혈 관객들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젊은 관객들은 도대체 어디서 영화를 보고 공부했고,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의문을 가졌던 해외 영화인들의 궁금증을 늦게나마 해소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시네필' 감독 박찬욱-봉준호
 
 1990년대 시네필이 몰렸던 1996년 2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 개막식.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렸다.
ⓒ 인디라인 김대현 제공
 
저자에 따르면 시네필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예술영화 제도화 과정에서 탄생한 이상적인 관객 개념이다. '시네필리아'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뜻하며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담론을 전파하는 방식이다. 모두 서구에서 온 개념이지만 한국에서는 1950~1960년대 시네팬(cinefan), 1970년대 영화광, 1980년대 영화주의자, 1990년대 영화마니아 등으로 불렀다.

1990년대 후반 문화학교 서울이 '시네필'로 호명하기 시작한 이후 2000년대 들어 정성일 평론가에 의해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로서 우정과 연대를 뜻하는 용어로써 '시네필' 사용이 제안됐다.

한국에서 '시네필'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를 전후로 한 시기였다. 이들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는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가 세계적인 위상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은 1980년~1990년대 영화에 심취했던 시네필 출신으로 첫 감독이 된 세대다. 이후 시네필 출신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의 중추로 발돋움해 왔다.

<시네필의 시대>는 한국의 시네마테크 문화를 현실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건 서구적 기준과 시네마테크의 원칙적 기준과 달랐던 상황을 일컫는다. 물론 저자는 기존 연구를 존중한다는 전제를 깔고는 있으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적 특수성을 인정하고 재정립하려는 것은 기존 연구와는 다른 시선이다.

이선주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필름과 극장으로 이뤄진 문화가 아닌 비디오광 문화에 기반한다. 개인적인 비디오 관람이 아닌 공동체적으로 비디오테크에 모여서 영화보기가 시네필 문화의 심장이었다.

집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홈비디오는 서구에서 1950년~1960년대 영화보기 경험의 고유함을 인식시키는 계기였다. 또 1990년대 예술영화관에서 주목받은 영화들의 경우 제작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에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참 늦게 따라 한 것이어서 한국의 시네필 문화를 '시체 사랑'을 뜻하는 네크로필리아로 비유하는 시선도 있었다. 

'압축성'과 '불순함'
 
 한국 시네마테크 운동의 선구자였던 고 이언경 영화공간1895 대표
ⓒ 이하영 제공
 
하지만 한국적 특수성은 이를 기반으로 시네필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1988년 시작된 이언경의 '영화공간 1895'는 민간 시네마테크의 시초로 평가된다. 필름으로 고전영화를 보던 시네마테크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비디오테크였으나 영화를 책으로만 공부하던 때 이를 영상으로 보면서 내용을 확인할 기회를 제공했다.

다큐멘터리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에서 봉준호의 회상처럼 비디오를 계속 다시 돌려보며 장면 장면을 연구했던 것이 한국적 시네필의 특성이었다.

<시네필의 시대>는 1990년대 시네필을 키워낸 자양분 역할을 한 대상으로 1995년 창간된 <키노>와 주간지 <씨네21>, 계간 학술지 <영화언어> 문화학교 서울과 동숭시네마테크 등을 주목하고 있다. 당시 매체들의 특성과 장단점 등을 비평하고 있고, 한국 시네필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있다.

이선주 교수는 한국의 시네필은 서구의 정형화된 시네필 문화와 달랐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한국적 시네필의 특수성을 '압축적 시네필리아'와 '불순한 시네필리아'로 정의한다.

압축성장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산업화와 민주화 등에서 다른 나라가 긴 시간 이뤄낸 것을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 압축성이 이 시네필 문화에도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수십년에 걸쳐 이뤄진 시네필리아의 역사가 한국에서는 1990년대라는 짧은 시간 안에 발생했다.

또한, 검열 등의 제도적 제약 속에 맞서 불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저돌적으로 돌파해내기도 했다. 극장과 필름이라는 신성화된 요소가 아닌 비디오를 통해 대안적 영화 사랑을 실천했던 특성을 저자는 '불순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이 1980년대 변혁운동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던 한국 영화운동의 연장선에 있음을 고찰하는 부분은 의미있다. 저자는 "시네필 문화를 1990년대 독자적인 시대의 산물로 볼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수용자 중심의 영화운동과 공동체 정신의 의제와 정신 계승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다.

시네필 연구의 중요한 첫발
 
 18일 저녁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시네필의 시대 : 한국 영화문화에서 비디오필리아와 시네필리아' 저자 이선주 교수 강연
ⓒ 성하훈
 
<시네필의 시대>는 그간 관객 문화 연구가 드물었던 현실에서 시네필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저작물이다. 수준 높은 한국 관객들의 근원을 다각도로 자세히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시네필 문화가 21세기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연구에 대해 중요한 첫발을 뗀 셈이다. 1990년대 시네필에게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가 1990년대 말 문화학교 서울을 오가며 시네필 세계로 들어왔고, 영화 소개 글과 리뷰를 쓰고 학술계간지 <영화언어>에 비평을 쓰던 경험이 시네필 연구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시네필의 시대>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은 지난 2023년 18년 만의 총서 발간 사업을 부활시켜 만들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저자 역시 "이 사업이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기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알찬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다만 의욕적으로 재개한 영진위 총서 사업이 예산 삭감으로 인해 곧바로 중단된 것은 아쉬움이다. 저술 지원의 중요성을 이 책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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