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우먼톡]집안을 지킨 여성, 조선을 지킨 여성

2024. 5. 2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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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조선에 정말로 크나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고작 2달 만에 수도는 함락되고 왕은 남한산성에 갇혀있다가 적군의 황제 앞에서 엎드려 항복했다.

조애중은 평생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중 셋은 어려서 죽었다.

아들 둘이 그나마 자라서 결혼을 했지만, 자식을 얻지도 못하고 죽었고 며느리들도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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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남이웅 아내 '조애중'
병자호란에 친척·노비 이끌고
남편 없이도 농사해 살아남아

병자호란은 조선에 정말로 크나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고작 2달 만에 수도는 함락되고 왕은 남한산성에 갇혀있다가 적군의 황제 앞에서 엎드려 항복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아니면 포로로 잡혀갔다. 특히 여인들에게는 더욱 험난한 시기였으니, 적군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자결하거나, 포로가 되어 머나먼 중국 땅으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그냥 살았다.

조애중은 세 번째의 경우였다. 그녀의 본관은 남평 조씨로, 조경남(曺慶男)의 딸이자 인조 때 좌의정인 남이웅(南以雄)의 아내였다. 조애중은 평생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중 셋은 어려서 죽었다. 아들 둘이 그나마 자라서 결혼을 했지만, 자식을 얻지도 못하고 죽었고 며느리들도 모두 죽었다.

"나는 어찌 된 팔자라서 4남 1녀를 낳았지만, 흔적도 없어졌는가." 그렇게 조애중은 외로움과 슬픔을 토로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이미 63세의 나이였다. 남편 남이웅은 조정의 대신으로서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그다음은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처럼 나라의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도저히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은 살아야 했고, 가족들을 챙겨야 했다. 그것은 오롯이 홀로 남겨진 조애중의 몫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조애중은 열네 명의 친척들과 노비들까지 이끌고 피란을 떠난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 충청도로, 전라도로, 그다음 또 다른 곳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별별 일이 다 벌어졌다. 피란민 사이에 일행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무인도에 가서 대자리를 깔고 지내며 눈을 녹여 마시고 바닷물로 밥을 지었다. 도둑이 들어 음식을 훔쳐 가기도 했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조애중은 나라를 걱정했다.

"망국(亡國) 중에 나라가 이렇게 된 일을 부녀자가 알 일이 아니지마는 어찌 통곡하고 또 통곡하지 아니하겠는가." 현실은 더욱 괴로웠다. 남편은 도통 소식을 보내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으로 가서 1년 넘게 돌아오지 못했다.

"영감은 집의 일을 잊었나 보다." 조애중은 일기에 그렇게 썼고, 꿈속에서 남편을 만나보곤 했다. 그렇게 외롭고 힘들었지만 조애중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살림을 꾸렸다. 전쟁이 벌어져도 먹고살아야 했으니, 피란을 다니는 와중에도 노비들을 보내어 농사를 짓고 김을 매며 수확하게 했다. 조애중의 노비들은 ‘전쟁통에 자신들이 무사한 것은 상전의 덕분’이라며 조애중 일행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양반과 노비의 신분제도가 있는 옛날이라 해도, 평소에 쌓인 두터운 신뢰 관계가 없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리고 이 와중에도 새 생명은 태어났다. 남편의 첩이 아이를 낳자 조애중은 죽은 자식들을 떠올리며 슬퍼했지만, 그런데도 서자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마침내 피란 생활은 끝이 났으며 남편도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1645년 그녀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서자들은 친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조애중은 전쟁을 맞이하여 절개를 보이지도 않았고, 훌륭한 자식을 낳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굳건하게 가정을 경영하고 가족들을 보호했으며,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먹이고 살려냈다. 전쟁을 겪고도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조애중 같은 사람 덕분일 것이다.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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