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세상 만들어 달라며 전 재산 바친 백정 이야기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원평집강소 전주화약 체결 후 각 고을에 집강소가 들어선다. 원평은 평생 멸시를 받고 살던 어느 백정이 헌납한 땅과 집에 집강소를 차렸다. |
ⓒ 이영천 |
조선 시대, 왕이나 양반에게 '백성'은 누구였을까? 다스림의 대상이던 상민(常民)이었을까? 아니면 세금을 부담하면서, 양반과 천민 중간 신분으로 천역(賤役)을 벗어난 양민(良民)이었을까?
조선 초기 양반을 통상 2% 미만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 노비 등 칠반천인(七般賤人)은 40∼50%라는 연구가 있다. 반면 후기인 철종 땐 70%가 양반이었으니, 이때 이르러 가히 조선은 모두가 귀족이었던 셈이다. 세금 회피가 목적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 70%에도 들지 못한 칠반천인은 얼마나 심한 차별과 억압을 받았을까? 그들이 백성은 차지하고 사람 취급을 받긴 했을까?
갑오년 혁명을, 주도 계급으로 보아 '동학농민혁명'이라 명명했으나 사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농민과 칠반천인을 망라한 하층민이 주도했다는 측면에서, 계급에 한정하지 않은 '동학혁명'을 더 타당하게 여긴다.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려 박정희가 사용한 동학혁명은 왜곡이니 별개로 하자.
▲ 홍낙관 판결문 동학혁명이 패퇴한 후 서울에서 재판 받은 후 내려진 판결문. 그는 장 100대에 3천리 밖 유배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이영천(동학농민혁명기념관 촬영) |
전쟁에서 이들의 행동은 어땠을까? 무척이나 과감하고 용맹했으리라. 1980년 5월 27일 새벽,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킨 이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 보면 명확해진다.
이름도 갖지 못한 천민이다. 평생을 울분과 비애를 천형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짓누르는 계급의 질곡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의 힘으로 해방공동체가 열린다. 전주화약 결과로 전격 시행되는 '집강소(執綱所)'를 통해 차별적 계급이 실제에서 혁파된다. 이처럼 민중은 늘 현명했다.
백성의 자치정부, 집강소 시대
낡아빠진 조선의 가장 큰 폐단은 권력 사유화였다. 그 모순이 단적으로 드러난 게 매관매직이다. 이를 정점으로 신분제 모순과 그에 따른 수탈구조, 그리고 오랜 계급 갈등과 차별이 더해져 사회가 폭발 직전에 이른다.
이때는 갑오 오월 초열흘이라 동학군과 관군이 서로 강화를 이룬 후, 관군은 경성으로 올라가고 동학군은 전라도 오십삼 주에 집강소를 설립하여 민간서정을 처리케 되었다. 각 읍에 집강 1인을 두고 의사원 약간인을 두었으며 대소관리들은 그를 도와 폐정개혁에 착수케 되었으며 동 폐정개혁 건은 동학군이 제시한 12개 조이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1 의역 인용)
집강소는 전라감사 김학진이 내린 명령의 권위와 혁명군 무력이 온전히 각 고을로 뻗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대로 각 군·현의 행정력과 경찰력, 군사력이 힘을 잃었고 이를 대체할 유일한 세력은 혁명군뿐이었다는 방증이다.
▲ 집강소 순찰 전라도 각 고을에 세워진 집강소. 혁명지도부는 수시로 순시하며 집강소 운영 실태 등을 점검했다. 박홍규 화백의 그림. |
ⓒ 이영천(대뫼마을 촬영) |
집강소를 통해 탐관오리와 탐학한 부호를 징치, 징계하고 다스린다. 권력을 수평으로 나누고 묫자리 송사 해결, 삼정 문란과 불법 고리채 엄단, 곡물 가격 앙등을 막는 방곡령 시행, 소소한 부채의 억울함 등등을 해소해낸다.
하지만 초기엔 순조롭지 못했다. 사소한 보복 행위가 있었고 강제로 재물을 빼앗거나, 부잣집 딸과 반강제로 결혼하는 사례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중심을 잡고 강력한 규율로 자치정부 본연의 모습을 갖춰나간다. 이렇듯 집강소는 우리 역사에 전무후무한 진정한 '해방공동체'였다.
혁명, 그리고 칠반천인
조선 시대에 구별하던 일곱 가지 천한 사람. 주로 조례(서울 각 관아에서 부리던 하인)ㆍ나장(의금부에 속해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하는 일과 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을 맡아보던 하급 관리)ㆍ일수(물을 관리하는 직책)ㆍ조군(세금을 나르는 배 선원)ㆍ수군(바다에서 국방과 치안을 맡아보던 군대)ㆍ봉군(봉화 올리는 일을 맡아보던 군사)ㆍ역보(역졸(驛卒)과 보인(保人)의 별칭)를 이르며, 이 밖에 노비ㆍ기생ㆍ상여꾼ㆍ혜장(鞋匠, 갖바치)ㆍ무당ㆍ백정 혹은 노비ㆍ영인(악공과 광대)ㆍ기생ㆍ혜장ㆍ사령ㆍ승려를 이르기도 한다.
어떤가? 이런 이들이 없었다면 사회구성체가 제대로 굴러갔을까? 관아나 군대에서 허드렛일에 종사한 부류는 그래도 좀 나아 보인다. 노비와 기생, 갖바치, 무당과 백정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있으면서도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받았다. 그들이 느꼈을 비애는 얼마나 처절했을까? 더구나 세습되는 계급의 질곡이라니. 여기에 얹힌 성(gender)차별은,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기제였다.
▲ 새 세상에 대한 꿈 동학혁명의 주된 동력은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계급 질곡 타파 요구가 바탕이었다. 그 꿈이 집강소를 통해 구현된다. |
ⓒ 이영천 |
이 요구에 칠반천인은 어찌 반응했을까? 아마 신세계였을 것이다. 두렵고도 설레며 막연했겠지만, 그 실체를 보았을 때는 무척 격동했을 것이다. 현실의 질곡을 깨부수고자 혁명전쟁에 온몸을 맡긴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누대를 이어온 억눌린 비애와 억울함을 풀어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즉자적으로 요구한 여성해방은 없다. 다만 '청춘과부는 개가(改嫁: 재혼)를 허할 것'이라는 조항에, 당시 차별의 극단에 내몰려있던 여성들에 대한 모든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동학혁명군은 이처럼 몇 걸음 앞서 세상을 걸어간 사람들이다. 양민은 물론 칠반천인에게도 새로운 세계, 대동 세상을 열어젖혀 보여 주었다. 새로운 세계를 알고 체험하면, 다시는 질곡의 옛날로 돌아가지 못한다, 설령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사람이다.
동록개의 꿈
금구 원평은 여러모로 동학혁명과 관련이 깊은 고장이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물론 최경선도 원평 근동에서 살았거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곳의 동학 터줏대감은 단연 김덕명이다.
교조신원운동 당시의 원평취회는 물론 고부봉기, 동학혁명 1차, 2차 봉기까지 주요세력의 한 축은 늘 원평 동학군 몫이었다.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에 이르러선 전라우도를 관장한 전봉준이 원평을 근거로 초기 집강소를 꾸려갔음도 곳곳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 원평 집강소 동록개가 헌납한 재산으로 설립된 원평 집강소. 일제 강점기 땐 면사무소로, 그 후엔 종교시설 등으로 사용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된 집강소이다. |
ⓒ 이영천 |
그토록 천하디천한 신분의 그가 전주화약 후 김덕명을 찾아온다. 천대받으며 살아왔지만, 열심히 일한 덕분으로 꽤 많은 재산을 모았던 그였다. 무척 신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는 방증이다.
그렇게 모은 재산 중 원평 한가운데 노른자위 땅과 집을 동학혁명군에게 내놓겠다고 한다. 사람 사이에 위아래는 물론 계급도 없는, 모두가 한울로 같은 사람이라는 동학의 뜻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땅과 집을 '원평 집강소'로 사용해 달라며 땅과 집을 헌납한다.
▲ 동록개의 꿈 완전한 평등과 자유인으로서 동록개의 꿈은 과연 이루어 졌을까? 2023년 가을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열렸던 기획 전시의 제목이다. |
ⓒ 이영천(촬영) |
김덕명 등 원평 동학혁명군은 그에게 늘 불리던 음운을 바꿔 '동록개'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그 후 동록개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덜 중요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얻었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2차 봉기에 나서 공주 우금치에서 웃으며 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형평'이라는 꿈을 완벽하게 이룬 셈이다.
생각해본다. 2024년 현재, 우리 사회의 칠반천인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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