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는 없다? 사랑 앞에 놓인 선생과 제자가 한 선택
[김성호 기자]
대중 입맛에 맞춘 영화를 쏟아내는 영화판이라지만, 영화계엔 여전히 작가라 부를 만한 인물이 존재한다. 제 색깔이 묻어난 저의 이야기를 하는 존재들, 그들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흔하고 흔한 방식으로 이놈이나 저놈이나 만들 법한 영화를 양산하는 이를 작가라 하지는 않는다. 저만의 세계관이며 인생관, 예술관이 선 작품을 만들어야 작가라고 불린다. 다양한 목소리가 경합하는 활력 있는 무대를 구축하려는 문화계가 작가를 우대하는 이유다.
▲ 사랑니 스틸컷 |
ⓒ JIFF |
전주영화제가 고르고 고른 4명의 작가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50주년을 맞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다시보다: 25+50' 특별전을 준비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한다. 한국영화가 오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온 지난 작가들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의 옛 작품을 선정해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영자원과 전주국제영화제가 각 4편씩을 선정한 특별전에서, 영자원은 반세기 이상 지난 고전 영화 4편을, 전주국제영화제는 21세기 들어 만들어진 작품 4편을 선정해 눈길을 끌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늘의 상영환경 가운데 다시 볼 만한 작품으로 꼽은 네 편은 오늘 한국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진 네 명의 작가의 작품이다. 봉준호, 류승완, 홍상수, 정지우가 그들로, 상영 작품은 '씨네만세' 앞선 편들에서 소개한 <플란다스의 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오! 수정>에 더하여, 오늘 소개할 <사랑니>가 되겠다.
▲ 사랑니 스틸컷 |
ⓒ JIFF |
파격적 데뷔, 6년의 기다림
아마도 관계자들이 선정하려 했던 것은 <사랑니>가 아니라 정지우라는 작가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또한 그의 영화 가운데 한 편을 이 섹션에 묶기 위하여 먼저 그의 장편 데뷔작인 <해피 엔드>를 고려하였으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작품보다 1년 앞선 1999년 작으로, 영자원이 20세기, 전주국제영화제 측이 21세기 영화를 선정한다는 취지에 맞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리하여 두 번째 작품이며 작가적 성향만큼은 찾아볼 수 있는 <사랑니>를 선정했다고 본다.
정지우는 지난 세기말, 최민식과 전도연, 주진모가 주연한 <해피 엔드>의 감독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신예였다. 흥행이 어렵다 여겨졌던 치정극임에도 훌륭한 연기력의 배우진과 파격적 설정으로 칸 영화제 국제 비평가 주간에까지 초청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흥행 성적 또한 좋아서 정지우에게 탄탄대로가 깔려 있다는 인상을 남겼을 정도였다.
▲ 사랑니 스틸컷 |
ⓒ JIFF |
제자를 사랑한 여교사... 금기 넘는 연애
주인공은 입시학원 수학강사 조인영(김정은 분)이다. 수려한 외모에 씩씩한 성격의 인영 앞에 어느 날 한 학생이 나타난다. 17살 고교생 이석(이태성 분)이 바로 그다. 인영은 이석에게 한 눈에 반한다. 이석이 제 첫사랑과 놀랍도록 닮았음을 느낀 뒤부터다. 심지어 이름마저 첫사랑인 이석과 같다. 이석은 인영에게, 또 인영은 이석에게 주체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둘은 그들 사이 놓인 선이 보이지 않는 양 모조리 넘어버린다.
인영의 동창이자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정우(김영재 분)와 미국에서 돌아온 옛 이석(김준성 분)이 이들 사이에 개입하며 이야기는 그야말로 좌충우돌로 흘러간다. 상당한 나이차가 있는 남녀, 또 학생과 제자라는 신분, 미성년자라는 사회적 금기까지 이들의 관계를 제약하는 요소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이 도리어 흥분의 요소이기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한 둘의 마음은 불 타 오른다. 정우와 옛 이석이 보이는 태도 또한 충분히 있을 법한 것이어서, 남과 여의 미묘한 감정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면모를 관객 앞에 끌어낸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 JIFF |
오늘의 영화를 더 애정하는 방법
필름으로 촬영한 작품을 디지털화해 4K로 화질을 올려 공개하는 리마스터링 작업이 진행된 것도 인상적이다. 이미 리마스터링이 이뤄진 바 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제외하고 남은 세 작품 모두 처음으로 4K 디지털화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영자원의 이 같은 작업은 시간이 흘러 옛 것이란 인상이 남은 작품을 조금이라도 친숙하게 오늘의 관객 앞에 선보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는 또한 영화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일과 마주 닿아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25년 전만 해도 홍상수, 봉준호, 류승완, 정지우 등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들이 오늘과 같은 지위에 있지 않았다. 팬들은 이로부터 그들이 아직 날 것 그대로의 가능성을 움켜쥐고 있던 시절의 작품을 새로이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히 오늘의 전주국제영화제에 공개된 작품들, 또 그를 만든 작가들을 돌아보게끔 한다. 이들 중 누구는 훗날 한국영화계, 나아가 세계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거장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오늘의 네 감독처럼 그들을 기리는 특별전이 진행될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제가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분명 오늘의 한국 영화계에도 새로이 얼굴을 들이미는 주목할 만한 작가가 있을 것이란 믿음을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 169일 만에 대중 앞에 선 김건희 여사... 사리반환 기념식 참석
-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 큰 불에도 살아남았는데... 덕수궁의 잃어버린 문
- 일주일 만에 1천만 원어치 완판... 곰팡이에 뭘 한 거야
- 대도시에 늘어나는 'OO맹 아이들'... 해결책은 간단
- 고물가 시대 자취생들이 해먹는 '닭밥야'의 정체
- 팔현습지 절벽에 수리부엉이가 터 잡은 진짜 이유
- 민주당, 'KC미인증 직구금지' 혼선에 "국민이 실험용 쥐냐"
- 네타냐후 '벼랑 끝' 위기... '반기' 든 이스라엘 전시내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