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섹스를 노래한 ‘68의 아이들’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1968년은 전 지구적 ‘시위의 해’였다.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등 전 세계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왔다. 이들의 공통된 요구는 하나. 미군의 베트남 철군. 베트남전 참상이 시시각각 TV로 중계되면서 세계 시민의 분노가 들끓어 오른 것이다. 한 사건에 대한 시위가 전 지구적으로 퍼진 최초의 사례였다.
집결한 시민들은 “무의미한 전쟁을 그만두라”고 외치면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자유로운 섹스의 권리를 보장하라.” 이 시위 행렬이 ‘68혁명’이라고 불림과 동시에 ‘섹스혁명(Sexual Revolution)’으로 명명된 이유다.
모든 혁명이 역사의 물길을 바꾸듯, 당대의 시위는 현재 서구 성 문화의 기반이 됐다. 자유로운 성관계, 동성연애 긍정, 나체를 부끄러워 않는 자연주의가 그 결과물이다.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에선 누드 마라톤, 누드 자전거 대회가 공공연히 열린다.
반전 시위는 어쩌다가 섹스 혁명으로까지 번졌을까. 그해의 5월을 다시 생각한다.
베트남전은 그 참상이 시시각각 세계 시민에게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폭격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TV 화면에 중계됐다. 공군이 쏟아붓는 포탄에 옷도 차려입지 못하고 울면서 달리는 아이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 지지를 받는 남베트남 수사당국이 즉결 처분으로 북베트남 군인을 총으로 살해하는 장면(응우옌 반 렘의 처형)도 분노를 자아냈다.
전 세계 청년은 참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청년들은 베이비붐세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례없는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았고, 평화에 대한 교육도 철저히 받았다. 윤택한 경제 환경은 평화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이들은 전쟁을 ‘악’이라 여겼고 베트남 반전 운동은 전 지구적으로 퍼져 나갔다. 1968년의 일이다.
시위의 장이 열리면, 모든 시민적 욕구가 동시에 분출되기 마련이다. 68혁명은 ‘반전’ 운동에서 시작해 ‘사회’ 운동으로 시나브로 번져 나갔다. 인종·환경·자연·여성·자본주의 반대 등 다양한 메시지가 분출됐다. 그동안 사회가 품지 못한 시민 욕구가 이 장 속에서 폭발한 것. 보수적인 시민 사회가 젊은이에게 주입한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기도 했다. 이들은 외쳤다.
“모든 금지를 금지하고, 상상력에 권력을 부여하라.”
가장 전위적인 메시지가 나온 분야는 ‘성’이었다. ‘68의 아이들’은 동성애를 옹호하고,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외쳤다. 공개 누드와 혼전 성관계 권리도 주장했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사랑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고. 또 세 사람 혹은 네 사람이 사랑을 나눠도 이상하지 않다고. 자기의 신체적 쾌락과 자유는 스스로의 선택에 맡겨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기성세대는 아연실색했지만, 젊은 세대는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성적으로 너무나 억압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혼전 성관계는 물론이고, 자위도 권장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부부 사이 ‘강간’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문명국’을 자처한 서구 사회였다.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교육받은 신세대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68혁명은 그야말로 전 세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빛나는 예술가들이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비틀즈가 그 단적인 예다. 그룹의 리더 존 레논은 일본 행위 예술가 오노 요코를 만나 ‘68혁명의 대표적 예술가’로 거듭났다. 대표곡 ‘이매진(1971년)’의 가사만 봐도 그렇다.
Nothing to kill or die for(희생시킬 일도 희생당할 일도 없어요).
전위적인 메시지는 ‘68의 정신’을 그대로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비틀즈는 또 노래했다. “Power to people(시민에게 권력을)”이라고.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벌거벗고 찍은 사진은 지금도 유명하다.
성적 자유는 일종의 시대정신이었기에 많은 예술가가 공감했다. 지미 헨드릭스와 밥 딜런도 68혁명 지지자였다. 롤링스톤스 보컬 믹 재거는 1968년 런던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감명을 받아 ‘Street Fighting Man(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이라는 곡을 썼다.
당대 최고 예술가인 앤디 워홀 역시 자신의 새 작품으로 보수적인 성 문화에 균열을 냈다. 노골적인 성행위를 그대로 묘사한 작품 ‘블루 무비’가 대표적이다. 앤디 워홀은 이렇게 얘기했다.
“줄거리가 없는 것은 의도적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베트남전처럼) 파괴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를 예찬함으로써 전쟁을 비판한 것이다. 미셀 푸코, 마르쿠제와 같은 철학자 역시 68혁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68의 아이들은 그들의 책을 읽고, 자본주의의 비판에 나서고는 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진보를 외치는 기존 좌파와는 달랐다.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영감을 받아 자본주의를 전복하려고만 했다면, 68의 아이들은 ‘미시 개혁’을 꾀했다. “정치적으로(거시) 진보라면, 일상생활(미시)에서도 진보여야 한다”는 생각. 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섹스를 했다. 자위와 피임, 혼외 관계도 긍정하면서 즐기기 시작했다. 여성을 억압하는 기존 성 체제는 단호히 거부했다.
너무 밝은 빛은 짙은 그림자를 부르기 마련이다. 혁명 에너지에 지나치게 감화된 이들은 정도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마약에 취했고, 또 일부는 “자본주의를 뒤엎자”며 폭력단체를 조직했다. 일본의 신좌파 부류인 적군파는 68혁명 이듬해인 1969년 결성됐다. 이들은 자국에서 여객기 351편을 납치해 북한으로 망명했다. 독일에서는 ‘바더 마인호프’라는 조직이 결성돼 은행 강도, 폭탄 테러, 납치 처단을 강행했다. 모두 “인민을 위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들 역시 “섹스와 총질은 똑같은 혁명 행위”라고 주장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68혁명은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시민의 ‘거대한 분노’를 알게 된 정치권이 서둘러 진보적인 입법에 나서면서다. 1969년 미국에서는 민권법이 통과돼 흑인 인권 운동의 전기가 마련됐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가 한층 보장됐다. 영국, 스웨덴,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전역에서는 여성 운동이 조직됐다. 여성의 낮은 임금에 문제를 제기하고, 낙태의 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였다. 미국 닉스 대통령은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병력 철수를 명령하기 시작했다.
68혁명은 서구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사랑은 성의 구별 없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고, 나체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 인간은 원래부터 맨몸으로 세상에 나온다는 게 이들의 관념이다. 오늘날에도 서양에서 공공적인 ‘누드’를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진정 68의 아이들이 꿈꾸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는 존재하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환경오염도 여전하고, 전쟁의 포성도 아직 멈추지 않았다. 휴화산인 68의 에너지가 언제 다시 그 분노를 표출할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9호 (2024.05.15~2024.05.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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