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화장실 써야 하는 아파트, 이 청년이 이사온 이유

김성호 2024. 5. 1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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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23]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광천동 김환경>

[김성호 기자]

지나온 역사를 통하여 인류는 배웠다. 정의가 수시로 패배한다는 것을, 귀한 정신조차 하찮은 폭력 앞에 무너지곤 한단 걸, 가장 값진 용기가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말이다. 옳음도, 정의로움도, 아름다움도 승리를 가져오지 못한다. 때로 어느 귀한 것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짓밟혀 오래도록 마음을 아리게 한다. 역사는 그토록 무심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건져내려는 이들이 있다. 악한 자들의 세상을 선으로 물들이려는 이들,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 선의 기치를 세우려는 사람들 말이다. 힘이 모자랄지 모른다. 그리하여 악을 파쇄하고 물리치진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싸움을 멈출 것인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유명한 작가 J. D. 샐린저는 극중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입을 빌려 "어떤 사물들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불가능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사라져선 안 되는 것을 지켜내려는 이들, 적어도 그 존재를 기억하려는 이들이 세상엔 아직 있는 것이다.

사라져선 안 되는, 적어도 기억되어야 하는
 
▲ 광천동 김환경 스틸컷
ⓒ JIFF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소개된 <광천동 김환경>도 그런 취지에서 제작된 영화다. 박동희, 김환경의 86분짜리 다큐멘터리로,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의 오랜 아파트 이야기를 다뤘다.

광천동이 어떤 곳인가. 몇 년 전만 해도 도심 속 빈민 단지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유스퀘어 광주 종합버스터미널 건물, 신세계백화점과 CGV 멀티플렉스가, 또 그 뒤로 KBC 광주방송이 자리한 동네가 광천동이다. 북으로는 영산강 지류인 광주천이 흐르고 남과 서로는 광주의 도심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 그러나 도시학적 관점에서 광천동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려진 동네, 도심 속 고립된 저소득층 집단 거주지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시대, 아주 오랫동안 그러했단 뜻이다.

이제는 고급 브랜드 아파트까지 들어선 이 동네 중심엔 오래된 구식 아파트 단지가 자리한다. ㄷ자 형태로 세 개 동, 184개 가구가 함께 살 수 있는 이 아파트는 빈민화 된 당시 대도시 문제를 해소하고자 전라남도 및 광주시 최초 관영아파트로 건립됐다. 완공은 1970년, 어느덧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썼다. 빈민을 어떻게든 시민으로 바꾸어놓고자 했던 당시 공직자들의 기원이 반영된 것일까. 아파트의 이름은 시민, 광천동 시민아파트다.

영화의 시작, 영상을 찍고 그것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20대 청년 김환경이 광주에 발을 디딘다. 제주에서 온 이 청년의 목적지는 시민아파트다. 낙후돼 사람이 살 상태가 아니라는 이 아파트에서 살아보겠다는 비범한 청년의 이야기가 곧 영화의 줄기를 이룬다.

청년 김환경이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온 이유
 
▲ 광천동 김환경 스틸컷
ⓒ JIFF
 
시작부터 만만찮다. 시민아파트를 중개하는 부동산을 찾는 일부터가 만만찮다. 하나같이 그곳은 낙후돼 사람이 살 만한 상태가 아니란 얘기 뿐, 겨우 찾은 부동산에서 얼마간 월세를 내는 조건으로 집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관리비가 얼마냐 물으니 그곳은 관리가 되지 않아 따로 없다는 얘기가 뒤따른다.

막상 찾은 집은 난감함 투성이다. 화장실은 1층의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고, 샤워실이 없어 씻지도 못한다. 음식을 해먹는 것도 마찬가지. 요즈음 집에선 당연한 일이 시민아파트에선 사치스런 일처럼 보인다. 매일 아침 1층으로 내려와 수도밸브를 열고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서는 제가 사는 층까지 지고 오르는 게 일상이다. 승강기도 경비원도, 분리수거며 다른 편의시설이 없는 건 물론이다.

그래도 살려고 들어온 일 아닌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집을 꾸미는 것부터 시작한다. 저소득층 집을 꾸며주는 봉사단체의 도움을 받아 청소하고 장판을 깔고 벽지를 바른다. 간단한 가구며 집기까지 놓아주니 비로소 사람이 살 만한 공간처럼 보인다. 여기에 제 친구들을 불러 멋스런 공간처럼 단장하니 허름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 빈티지 작업실이 따로 없다.

다음은 주변을 파악하는 일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여적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김환경은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 그가 듣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 듯 보인다. 그로부터 조금씩 잠겨 있던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민아파트 '영광의 순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 광천동 김환경 스틸컷
ⓒ JIFF
 
시민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들은 죄다 노인들뿐이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들어오는 이는 없고 남은 건 남아 있는 이들 뿐이다. 반세기 넘게 나이든 아파트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사람들, 추억이 있는 이들, 나갈 곳이 없는 이들, 각자의 사연으로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이다.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지만 서로가 공유하는 추억이 있다. 1970년대 이곳에서 일었던 노동운동, 그중에서도 들불야학의 중심지가 바로 여기 시민아파트였다는 것이다. 당시 공단이던 광천동 일대에 모여든 도시빈민들에게 교육을 하자는 것이 들불야학의 모태였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들이 광천공단 청년 노동자들을 모아 교육을 진행한다. 도시빈민들이 모여 살던 시민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에 김영철이 있었다.

김영철은 1970년대 시민아파트 사람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던 이들이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며 더럽고 냄새나던 공간을 그가 앞장서 뒤바꿨다고 전한다. 아파트 현관에 종을 매달고 때가 되면 종을 쳐 아이들을 모아 청소를 시켰다. 들불야학 강학들과 가까이 지내며 이 아파트를 근거지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술과 음식을 사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모두에게 행복한 기억을 안겼다.

시민아파트 주민들은 청년 김환경 앞에서 오래 전 떠나간 김영철을 떠올린다. 그가 살았을 적 이뤘던 일들, 함께 나누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사람냄새 나는 추억들, 못함에서 나아짐으로 변화하던 모습들, 그 안에 깃든 애정과 자긍심들, 이웃끼리 부대끼며 겪어낸 것들을, 온갖 좋은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날 끝나버렸음을 영화는 마침내 이야기한다.

1980년 5월의 광주... 누가 그들을 망쳤는가

1980년 5월의 광주, 김영철은 도청에 있었다. 그는 들불야학 강학들, 열사들과 함께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다. 패배를, 죽음을 알면서도 역사가 마침내 저들을 기억해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그 안에 들어가길 선택한다. 아내를 밖에 남겨둔 채 들어간 김영철은 아끼던 동생들을 모조리 잃고 계엄군에 붙들려 끌려나온다. 상무대 영창에서부터 겪은 갖은 고문으로 뇌신경 손상을 입었고, 7년의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후유증으로 숨진다.

철거를 두고 온갖 잡음이 이는 이 낙후된 아파트에서 1980년 5월의 기억까지가 한달음에 이뤄진다. 청년 김환경은 목표한 바 그대로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광주의 오늘 안에 담긴 잊혀선 안 되는 기억에 이른다.

누군가는 말한다. 재개발에 낭만이 무슨 말이냐고. 조합원이 따로 있는데 개발사업을 가로막는 외부의 목소리는 무엇이냐고 말이다. 들불야학과 그 근거지인 시민아파트를 보존하자는 목소리는 그저 누구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막는 외침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논리 너머로 그저 사라져선 안 되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빈민들을 가르쳐 의식을 일깨우고 주변을 치우고 서로를 보듬도록 했던 이야기들이 말이다. 어쩌면 그 목소리가 김환경을 이제는 사는 이 얼마 없는 낙후되고 불편한 아파트로 불러온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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