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도 많았고, 시장도 커졌다…남양서 '계절풍'이 갖는 의미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2>]

김기협 2024. 5. 1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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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동남아는 다도해(多島海)로서 초기 해상활동의 발달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지중해문명의 요람 에게해와 같은 조건이었다. 다만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동남아의 섬 중에는 초호(礁湖, lagoon)를 가진 곳이 많았고, 그 해역에는 안정된 계절풍(monsoon)이 있었다.

열대-아열대 해역에 산호초의 퇴적으로 만들어진 초호는 수산물 채집이 쉬운 곳이어서 식량 획득의 중요한 무대로서 수상민 집단을 키워주었다. 남양 주민들은 초호에서 사용한 통나무배를 출발점으로 조선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찰스 다윈의 1842년 책에 붙인 산호초 분포도.
초호로 둘러싸인 보라보라섬. 바닥이 얕은 초호에는 해산물이 풍성하다.


동남아의 계절풍은 예측이 쉬워서 범선 항해에 편리한 조건이었다. 남양인은 기원전 2천년경부터 게집개돛(crab-claw sail)을 만들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모양의 삼각돛(lateen sail)이 지중해에 나타난 것은 2세기경이었다. 지중해에서 중세기까지 갤리선 등 인력으로 움직이는 항해 형태가 주종이었던 반면 남양에서는 일찍부터 범선이 주역이 되었다.


편리한 수상 운송이 지역간 분업을 촉진


수상 운송은 육상 운송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 30 킬로그램의 곡식을 사람이 지고 1천 리의 거리를 옮겨놓으려면 비용이 짐 가치의 절반에 육박한다. 가축을 이용하면 비용이 좀 줄지만 차이가 크지 않다. 그에 비해 수상 운송의 비용은 엄청나게 싸다. 수상 운송 종에도 노 젓는 배는 약간의 비용이 들지만 범선의 비용은 공짜에 가깝다.

남양 사회에서는 편리한 수상 운송 덕분에 교환경제 활동이 일찍 시작했다. 청동기 유적을 보더라도 초기에는 많은 곳에서 제작이 행해졌으나 어느 단계에서 대부분 발전을 멈추고 몇 곳으로 좁혀졌다. 다른 곳에서 주조된 제품을 쉽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호의 수산업도 지역간 분업을 촉진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수상민 중에는 해안에서 농사를 병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수산업에 전념했다. 인근 농업사회에 소금과 생선 등 해산물을 공급하고 곡식과 직물, 그리고 그릇과 도구 등을 공급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역 활동이 차츰 확장되었다. 해산물은 농산물에 비해 멀지 않은 지역 사이에도 특산물의 차이가 있어서 교환의 필요가 일어났고, 항해에 익숙한 사회였기 때문에 시장의 규모가 쉽게 자라났다. 그 연장선 위에서 역외 지역과의 장거리교역도 생겨났다.

정향(丁香)은 술라웨시섬과 뉴기니섬 사이의 말루쿠제도에서만 나던 향료인데 기원전 1720년경으로 추정되는 시리아의 테르카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뉴기니섬 북쪽의 뉴브리튼섬에서 나온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동남아 각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동남아 지역 내, 그리고 외부와의 사이에 선사시대부터 교역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증거다.


종교의 구속력이 약했던 남양사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역의 물량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조그만 배로 이뤄진 초기의 장거리교역에서는 소량의 귀중품만이 옮겨졌다. 정향 같은 남양 향료는 시장에서 상품으로 돌아다니기보다 특수계층 내에서 선물로 쓰였을 것이다. 그러다 각지의 경제 발전에 따라 수요가 자라나고 그를 구하기 위해 외지인이 남양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교역이 늘어나면서 교역 중심지에 항구도시가 형성되었다. 교역량이 작을 때는 해상활동을 하는 집단들이 내륙의 농업사회에 대해 주변적인 위치였다. 생활필수품 대부분이 농업사회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역의 경제적 비중이 커지면서 인구가 늘고 위상이 높아졌다. 항구도시와 배후지 농업사회의 공생관계로 ‘네게리(Negeri)’ 구조가 형성되는 조건이었다.

항구도시에는 외지인이 많이 살고 현지민이라도 내륙 주민과 활동 양상이 달랐기 때문에 항구도시와 배후지 사이에는 문화적 단층이 생겼다. 외래종교도 항구도시에서 먼저 수용되었다. 같은 힌두교나 불교라 하더라도 해양부 항구도시의 수용 양상은 대륙부 농업국가와 달랐다. 농업국가에서는 외래종교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반면 항구도시에서는 개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다.

남양의 외래종교 수용에는 현지사회의 필요에 따라 굴절시키는 편의적 태도가 두드러진다. 힌두교와 불교의 경우 토착의 정령신앙(animism)과 결합시키는 경향이 널리 지적된다. 후에 들어온 유일신교인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우도 “엉터리 교인” 문제가 각 교단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남양사회에서는 종교의 구속력이 비교적 약했던 것 같다.

종교에 대한 편의적 태도가 교역의 중요성 때문에 항구도시에서 형성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중국식 천하체제에 맞춰 ‘조공’을 표방한 것처럼, 이슬람세력, 기독교세력과의 관계를 위해 ‘개종’을 표방했을 것 같다. 교역의 중요성이 덜한 대륙부보다 해양부에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파가 쉬웠던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는 지금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를 가진 나라지만 이슬람 전래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1414년에 지어진 와파우웨 모스크가 인도네시아에 남아있는 최초의 모스크다. 이 모스크가 향료제도의 말루쿠섬에 지어진 것을 보면 향료를 찾아온 이슬람 상인이 많았던 모양이다.

중국보다 남양의 도시였던 취안저우(泉州)


남양 항구도시의 형성 과정에 관한 설명을 찾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남중국 항구도시 중에도 남양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 곳이 있지 않을까? 푸젠성의 취안저우(泉州)가 그럴싸하게 생각된다.

푸젠성은 광저우(廣州) 일대보다 중국화가 많이 늦은 곳이었다. 기원전 2세기말 남월 정복 이후 중국 남해안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도시는 광저우였다. 그런데 송-원 시기(10-14세기)에는 취안저우가 더 번성한 때가 많았다. 낮은 중국화 수준 덕분에 외국 상인의 이용이 편해 역설적으로 번영의 조건이 된 것 같다.

13세기 초에 나온 〈제번지(諸蕃志)〉는 그 시대 중국에 얼마나 넓은 범위의 해외에 관한 지식이 전해져 있었는지 보여준다. 취안저우 시박사(市舶司)를 운영한 조여괄(趙汝适) 자신은 해외에 나가본 일이 없는데, 취안저우에서 모은 정보를 이 책에 담았다. 남양 항구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번방(蕃坊-외국인 구역)을 이루고 살던 곳이었다.

〈제번지〉 중 교지(交趾)에 관한 내용.
북송 때(1009) 세워진 청정사(??寺)는 중국 최초의 모스크로 남아있다.


20년간의 동방 체류를 끝내며 1291년 취안저우에서 배를 탄 마르코 폴로는 그곳을 “동방의 알렉산드리아”라 했다. 이븐 바투타는 1345-46년에 취안저우를 통해 중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취안저우를 통해 떠났다. 취안저우는 ‘자이툰(Zayton)’이란 이름으로 중국 외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 도시였다.

〈동방견문록〉 15세기 판본 삽화에 그려진 ‘자이툰’의 모습.
1053-59년간 지어진 낙양교(洛陽橋)는 폭 40 미터에 1,2 킬로미터 길이로, 중국 최대의 돌다리 중 하나다.


송-원 교체기의 취안저우에서 이주민집단을 대표한 인물이 포수경(蒲壽庚)이었다. 아랍인 거상(巨商) 포수경은 시박사를 맡고 있다가 해적 퇴치 실적을 발판으로 지역 병권(兵權)까지 장악했다. 원나라의 남송 정벌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후 그 집안은 원나라 최고의 색목인 가문으로 취안저우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원나라 말년의 무슬림 폭동(1357-1367)은 그 집안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폭동과 그에 이은 무슬림 대학살로 국제도시로서 취안저우의 면목은 크게 무너졌다. 그러나 정화 함대(1405-1433)가 출동 때마다 취안저우 등 푸젠 지역에 여러 달 머물며 항해 준비를 한 사실을 보면 외부와의 연결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남양의 대표적 수출품 향료


남양인의 대외교역은 채취한 특산물을 수출하고 가공상품을 수입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교통이 편리한 조건이 제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향은 선사시대의 청동기 생산에서부터 나타났다. 직물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직조 기술이 일찍부터 발생했으나 대량생산을 위한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것은 다른 곳에서 쉽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제조업이 비슷한 양상이었다.
아랍인이 원주민을 사역해 향료를 채취하는 모습을 그린 〈동방견문록〉 삽화.
모로코 향료가게의 진열 모습.
중국 카슈가르 시장의 향료 노점상.

남양 특산물을 대표한 것이 향료다. 대항해시대도 향료를 찾기 위해 열린 것이라고들 한다. 필수품도 아닌 향료가 어떻게 그리 큰 경제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을까. 한의사 조성훈 선생에게 향료와 약재의 관계에 관해 묻다가 재미있는 답변을 얻었다.

“‘藥’의 글자에 ‘樂’이 들어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풍류를 통해 천인합일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과 약을 통해 질병을 이기고 심신을 기르는 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태와 어울려 투쟁하고 공생하는 과정을 음악의 화음에 비유한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물질을 음악의 ‘樂’에 ‘풀 草’자를 더하여 약이라는 글자로 사용한 것입니다.

음악이라는 것이 안 들으면 허전하고 익숙한 것을 찾게 되게 되는 것을 중독성으로 볼 수 있는데, 약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있습니다. 특히 약과 상업이 결부되면 점점 더 중독성이 강한 약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찾게 되는 것이 향료고 커피를 거쳐 결국 아편에 이르게 됩니다.”

열대-아열대 지역에서 향료-약재가 많이 나는 이유도 설명했다. 향료-약재 성분은 식물이 자기보호를 위해 생성하는 것인데 균의 발생이 쉬운 열대-아열대 환경의 식물이 항균성 물질을 생성할 필요가 크다는 것이다.

남양 향료의 가장 큰 소비시장은 일찍부터 중국에 있었다. 중국의 수요는 남양의 향료 채취 -재배 양상에 꾸준히 자극을 가해 왔다. 15세기를 전후한 유럽의 향료 수요 격증이 유별난 현상이었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책 두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잭 터너의 〈향료: 어떤 유혹의 역사 Spice: The History of a Temptation〉(2004)와 폴 프리드먼의 〈동쪽으로부터: 향료와 중세인의 상상력 Out of the East: Spices and the Medieval Imagination〉(2008)이다.

(좌) Jack Turner, The History of a Temptation. (우) Paul Freedman, Out of the East: Spices and the Medieval Imag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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