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 살며 겪은 가장 큰 지진

설미현 2024. 5. 1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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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해역에 7.1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던 날

[설미현 기자]

 
▲ 발리의 킨타마니 화산 발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화산 지역 풍경입니다. 직접 촬영했습니다.
ⓒ 설미현
 
파견 근무로 발리에 나와서 살게 된 지 열 달째이다. 이번 달에 겪은 지진도 무서웠지만, 사실 작년 8월에 겪은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엔 지진을 자잘하게 몇 번 겪어본 후라 대피 요령 등을 익혀 놓고 있었지만, 발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인 작년 8월에는 속수무책 그저 지진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작년 8월 마지막 주 화요일이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크게 지진을 겪은 날이었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날 정말이지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다. 어릴 때 나는 울산에 있는 외가에 갔다가 소소한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크게 두려움을 느꼈다.

나중에 되짚어 생각해 보니 월요일부터 이상했던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월요일 새벽부터 이상하게 동네 개들이 몹시도 짖어대서 잠을 설쳤다. 개들만 그런 게 아니라 닭들도 울어젖혔다(올해 지진 때 닭들은 울지 않았다). 개들은 순서 없이 계속 하울링을 해댔고, 닭들은 순서대로 대화하듯이 꼬끼오를 외쳤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목청이 메어 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닭이 계속 울어대는 것이었다. 자기들끼리 저렇게 간절하게 할 대화가 뭐가 있다고, 미친 닭들이 잠이나 잘 것이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 살아 나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외침이었던 것이었다.

도마뱀들은 보통 12시 정도에 우리집 1층이나 벽장 속에서 울곤 했는데, 그날은 새벽 2시, 3시 할 것 없이 계속 노래를 해댔다. 오늘 대체 뭔 날이길래! 정말 신경질이 난 상태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눈이 퀭해서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에 아들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아침을 준비하며 사과를 하나 깎아주려고 옆에 있는 도마를 꺼내려고 왼쪽을 무심히 쳐다 보았는데, 아 진짜, 무지하게 커다란 바퀴벌레 하나가 그릇 건조기에 끼워 세워놓은 도마 가장자리에 떡 허니 몸을 기울이고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왜 내 부엌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매일 봐야 하냐고! (지금 생각해 보면 벌레마저 대피 중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허겁지겁 집에서 나가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아들과 나는 비명을 질렀고, 부엌에 나타난 바퀴를 처치해야만 하는 사명을 가진 나는 그 놈을 욕실에서 없앨 계획을 세웠다. 원래는 도마를 살짝 꺼내서 욕실로 들고 가려 했으나, 이 영악한 바퀴벌레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 뒤에 있는 쟁반으로 옮기는 바람에(이 나쁜 놈아, 그 바람에 도마뿐만 아니라 쟁반도 씻어야 했잖아!) 도마 대신 쟁반을 들고 욕실로 살그머니 걸어가서, 쟁반을 공중에다 휘둘러 그놈을 패대기친 후에 바퀴벌레 스프레이 약을 사정 없이 분사해서 그 놈을 처치하는데 성공했다(지금 생각하니 이 놈은 지진이 무서워서 나왔다가 스프레이 약으로 더 일찍 죽은 셈이 됐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러 현관문을 나가면서, 웬 개미떼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서둘러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도 개미떼들은 바쁘게 줄을 지어 다니곤 했는데, 뭐랄까 월요일 아침엔 그 수가 훨씬 더 많아서 줄이 좀 더 굵어 보였다. 아침에 너무 큰 바퀴벌레를 처치하다 보니 착시 현상이 일어난 거려니 하고 그냥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제의 화요일 새벽, 지진이 일어난 날에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살면서 최초로 입양한 작은 강아지와 함께 밤을 보내는 첫날이었다. 두 달밖에 안 된 조그만 푸들이라 여기저기 똥칠하는 건 둘째치고(또 똥 얘기를 벗어날 수 없다니, 결코 고상할 수 없는 나의 발리 생활담), 애기 같은 강아지가 혹시 잠들지 못할까 봐 신경이 쓰여 가족들도 다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던 밤이었다.

아, 그런데 새벽 세 시경부터 이상하게 침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강아지가 안 자고 침대에 매달려 있나 했다. 진동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3킬로그램짜리 강아지가 흔들면 뭘 얼마나 흔들겠나. 

강아지를 잘 단도리하고 누웠는데도 또 침대가 세게 흔들리길래, 이번엔 쿨쿨 잠든 아들이 다리를 흔들며 자나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보기에도 침대가 너무 흔들렸다. 게다가 아들은 다리를 떠는 버릇이 없었다. 남편은 다리를 떨긴 하는데, 잘 땐 세상 모르고 꼼짝 안고 자는 편이고.

그러다 갑자기, 집안의 모든 벽이 우당탕쿵탕 울리는가 싶더니 집에 벼락과 우박이 떨어지듯이 우두두둑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필시 벽이 곧 푹 하고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굉음이었다.

우리는 자다가 깜짝 놀라서 동시에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붕 위로 한 떼의 말이 지나가는 것처럼 와당탕 와당탕 동물들이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집에 살고 있던 모든 동물들이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는 건가 싶었다. 동물들의 탈출 소리가 생각보다 길어서 두려웠다. 이것들이 지붕 천장을 내려앉히면서 왕창 내 앞으로 다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어야 할 텐데, 소리로 봐선 이 집에 길고양이도 있고 고양이만큼 크다는 쥐도 살고 있었나 보다, 제발 만나지 말아라, 하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순간, 이번에는 벽이 상하전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에서 약간 우지직 소리도 새어나왔다.

설마 이층집이 무너지려는 것인가, 멍해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앉아 있는데, 아들이 재빠르게 몸을 책상 밑으로 숨기며 외쳤다.

"엄마, 지진인가 봐! 어서 이리로 들어와!"

학교에서 지진 대피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아들은 확실히 대피가 빨랐다. 갓 식구가 된 강아지도 잠을 깨고서 지붕이 있는 캐리어 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로써 내가 보호해야 할 생명들은 안전하다 싶어서 나는 용기를 내어 방 밖으로 나가보았다.

지진 대피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어른은 지진이란 현실을 믿지 못하고 집 안팎을 더 살폈다. 상황에 따라선 어리석은 판단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집이 흔들림을 멈추었고 동물들의 탈출 소리가 멎어서 나름 안전해졌다는 판단이 들어서 발코니 창을 열고 밖을 살펴 보았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이 발리의 새벽은 발리의 새벽은 평안한 장밋빛이었다. 분명 집이 흔들리고 지붕 위로 동물들이 빠져나갔는데, 나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고요한 새벽이었다.  

한바탕 지나갔다는 판단이 생겨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가운데 다시 잠을 청해 보았다. 네 시경에 한국에서 가져온 핸드폰이 두 번 징징 울렸다. 외교부의 안내 문자란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더니, 내 생각과 같이 지진 관련 문자가 와 있었다.

한국 시각 08월 29일 04시 55분
인도네시아 마타람 북북동쪽 207km 해역
규모 7.1 지진 발생 (위경도 -6.78, 116.57)

방금 폭풍이 휘몰아치듯 순식간에 겪었던 모든 경험이, '지진 7.1'이란 단어로 간단하게 함축되어 설명됐다. 정말이었구나. 만약에 바다가 아니라 거주 지역에 지진이 발생했더라면, 인간은 무슨 수를 써도 피하지 못했을 재난이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었고 이 와중에 운이 좋았다.

다음에는 지진인지 아닌지에 대해 좀 더 분명히, 빠르게 판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진이면 어떻게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흔들림이 세지 않다면 아들의 손을 잡고, 강아지를 캐리어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서 밖으로 대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에 참고할 만한 지진 대피 요령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보니 꼭 신발을 신고 대피하라는 안내가 있었다. 맨발로 나갔다가는 지진 잔해에 발을 다쳐 더 크게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있다고 되어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1층 입구에 오픈 신발장을 비치해 두었으므로 탈출하면서 신발을 땅에 던져 신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면서 지갑을 꼭 찾아서 나가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지갑을 보통 2층에 두고 자는데, 두는 장소가 일정하지 않다. 어느 한 군데 장소를 정해서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어느 날엔,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중요한 연락처들과 번호 같은 것들을 보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 내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가 생겨도, 내 생을 30년도 넘게 알고 있는 내 친구가 내 인생의 뒤처리를 도와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를 가려면 6시 20분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므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다섯 시쯤 되지 않았을까 싶을 때 아래 층에서 도마뱀의 소리가 들렸다. 

똑또로로록, 게이꼬! 

아니 도마뱀이! 넌 안 떠났구나! 넌 우리만 남겨두고 살겠다고 나가지 않았어! 

나갔다가 들어온 건지, 아니면 아예 안 나간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집 행운 수호신 도마뱀은 "난 너희와 함께 있으니 염려마"라고 하듯이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집안에 동물이 있다는 것은 지진이 지나갔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세상에 그렇게 도마뱀 소리가 반가울 수 없었다.

공포스럽던 새벽이 지나가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 같던 저녁이 다시 돌아왔다. 밤에 이상하게 동물들의 탈출 소리가 또 났다. 약간 불안해졌지만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탈출 소리도 짧게 나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 그러나 며칠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것은 여진의 징후였다. 나는 인간치곤 예민한 편이라 본진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여진은 감지할 수 없었다. 지진을 느끼고도 제때 알아서 피하지 못했다. 인간은 정말 생존에 필요한 본능이 부족한 동물인 것 같다.

남은 열한 달 동안 제발 더는 이런 일 겪지 않고 무탈하게 지나갈 수 있길 빌었다. 하지만 내 간절한 소망이 무색하게도 크고 작은 지진이 늘 뒤따랐다. 그다음으로 컸던 지진이 이번 달에 겪은 소롱 남쪽 해역에서 발생한 지진이었다.

아아, 경험을 풍부하게 쌓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지진 경험은 이만 사양하겠어요. 이제 그만 겪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 기자 본인의 브런치 스토리에 게재된 글을 다듬어서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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